가을의 시작은 언제일까. 올해는 입추가 8월 7일, 처서가 8월 23일이었다. 추석도 유난히 일러서 중추가절(仲秋佳節)에도 더위가 꼬리를 내리지 않았으니, 과연 가을이 오긴 왔나 싶었다. 아직 오곡백과도 덜 여물었고 만산홍엽, 가을의 절정을 맞이하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만 벌써 누런 은행알들이 떨어져 구르고 새벽이면 찬 공기에 이불자락을 바짝 끌어당겨야 하니, 시나브로 가을이 와서 어느새 여름을 전송하였다.
가을을 붙잡은 고형렬 시인의 동시 ‘가을 다로롱’은 느린 시다. “다로롱 다로롱”으로 채집된 방울 소리, 풀벌레 울음소리가 느리고, 꼬맹이와 함께 산길을 걷는 발걸음이 느리다. 자꾸 뒤돌아보는 동작은 느린 발걸음을 자주 멈추게 한다. 쨍쨍 날카롭지 않은, 다로롱 맑은 풀벌레 소리를 시인은 “속이 빈 방울”을 아주 천천히 굴려서 나는 소리로 연상한다. 함께 걷는 꼬마는 그 방울 소리를 제 손에 쥐게 해 달라고 한다. 방울 소리를 손에 잡고 싶어 뒤돌아보는 아이의 눈길에 단풍 든 떡갈나무 숲과 산길이 찰칵, 찍힌다. 방울 소리를 잡으려는 욕망은 가을을 붙잡으려는 시심과 다르지 않다.
이 시의 풍경은 매일매일이 속도전인 일상, 그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있다. 멀지 않은 교외의 숲길인 듯싶으면서도 홀연 속세를 벗어난 시공인 듯하다. 아니, 그저 오늘이나 내일 우리가 걸을 수 있는 호젓한 가을 산책길의 감상을 가볍게 스케치했을 따름이다. 동시집에 실려 있지만 굳이 동시여야 할 이유는 없는 이 시는 아주 천천히 방울을 굴리는 풀벌레의 속도를 따라 느리게 읽고 감상해야 하리라.
가을의 끝은 언제일까. 프로야구 팬들에겐 가을 야구가 끝나야 비로소 이 가을도 끝날 것이다. 두산과 엔씨, 넥센 외에 엘지, 기아, 에스케이, 롯데 그리고 한화와 삼성 중에서 두 팀에게만 가을 야구가 허락될 듯하다. 간절히 기다리는 가을 야구의 함성이 귓가에 쟁쟁하더라도, 고적한 가을 숲을 천천히 거닐며 풀벌레 소리에 젖어 드는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 보자.
김이구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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