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이 22일(현지시간) 정치풍자 토크쇼에 출연해 완전히 망가졌다. 독설과 조롱으로 출연자를 당황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잭 갈리피아나키스가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 ‘비트윈 투 펀스’에 출연하면서다. 최근 공화당 대선 후보 트럼프와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자 젊은 유권자들이 많이 보는 프로그램에 나가 표심을 얻어보겠다는 전략이다.
토크쇼는 시작부터 강렬했다. 클린턴을 소개하는 이름 밑에는 ‘폐렴에 걸렸었음’이라는 자막이 붙어 그의 건강 문제를 조롱했다. 이어 갈리피아나키스는 클린턴에게 “미국의 첫번째 소녀(girl) 대통령이 될 수 있어 신나냐” “당신에게 연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이메일인가” 등의 자극적인 질문을 던졌다. 각각 클린턴의 ‘첫 여성 대통령을 만들어 달라’는 선거 전략과, ‘사설 이메일 사용 문제’를 공격한 것이다. 클린턴은 이에 갈리피아나키스를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지한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방송 콘셉트를 따른 것이다.
클린턴이 제 발로 갈리피아나키스를 찾아가 조롱거리가 된 일은 미국 내에서 정치풍자 토크쇼가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통쾌한 유머로 무장한 정치풍자 토크쇼는 미국 정치판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 주간 타임지는 이번 대선의 특징으로 “기괴한 주장을 일삼는 트럼프가 대선 후보가 되면서 정치풍자 토크쇼가 범람하고 있다”고 꼽기도 했다.
현재 미국 지상파와 케이블TV에서 방영되는 정치풍자 토크쇼는 20여개에 달한다. 존 올리버의 라스트 위크 투나잇(HBO), 세스 마이어스 토크쇼(NBC), 지미 키멜 라이브(ABC) 등은 동시간대 시청률 상위권을 기록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풍자 토크쇼 ‘데일리 쇼’는 케이블채널(코미디 센트럴)에서 방영됐음에도 평균 시청자가 350만명에 달했다. 그만큼 여론 형성에 미치는 영향력도 막강하다. 클린턴, 오바마 등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제 발로 토크쇼를 찾는 이유다.
정치풍자 토크쇼는 주로 오후 10~12시의 시청률 황금 시간대에 30분~1시간 동안 방영된다. 전반부에서 최근 정치 이슈를 알려주고, 후반부에 유명 정치인을 초청해 인터뷰하는 형식이다. 코미디지만 ‘뉴스’를 다루기 때문에 수십명의 작가들이 투입돼 팩트 체크를 한다. 라스트위크 투나잇의 진행자 존 올리버가 트럼프가 주장하는 멕시코 장벽 설치에 25억달러(약 2조7,500억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혀낸 게 대표적이다.
최근 정치풍자 토크쇼의 단골 소재는 단연 도널드 트럼프다. 데일리 쇼의 현재 진행자인 트레보 노아는 트럼프의 인종 차별, 핵 무장론 등에 대해 “진정한 대통령의 발언”이라며 “로버트 무가베(짐바브웨), 무아마르 카다피(리비아) 등의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이미 같은 주장을 했다. 트럼프는 단지 대륙을 잘못 선택했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NBC의 마이어스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멜라니아 트럼프가 미셸 오바마 연설을 표절한 것을 지적하며 “연설을 조금만 더 길게 했으며 아예 자신의 남편을 사샤와 말리아의 아버지(오바마)로 불렀을지도 모른다”고 조롱했다.
클린턴도 공격을 피해가진 못한다. 노아는 폐렴 진단을 받은 사실을 숨긴 클린턴이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을 두고 “이런, 클린턴이 페렴을 상점의 무료 샘플처럼 나눠주고 있다”고 비아냥댔다. 클린턴의 지나친 사생활 비밀주의를 비꼰 것이다. NBC의 마이어스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팀 케인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것을 두고 ‘너무 안전한 선택’이라고 혹평한 뒤 “그의 연설은 너무 지루해서 심지어 (공화당 부통령 후보) 마이크 펜스를 가이 피에리(미국의 스타 셰프)처럼 보이게 했다”고 조롱했다.
정치풍자 토크쇼의 긍정적 효과는 상당하다. 우선 통쾌한 웃음으로 정치에 시큰둥한 시청자들을 시사에 관심을 갖도록 변화시킨다. 시카고 로욜라대 에미 베커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정치풍자 토크쇼의 시청자는 전통 뉴스 시청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정치, 선거, 시위에 참여하는 성향을 보였다”며 “정치풍자 토크쇼는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다”고 말했다.
이미 딱딱한 전통 뉴스 프로그램을 지루하게 여기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정치풍자 토크쇼로 뉴스를 소비하는 성향도 뚜렷하다. 2012년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 데일리 쇼의 시청자 중 39%가 30대 이하였고, 콜버트 리포트의 경우 43% 이하가 30대 이하로 나타났다.
정치 풍자쇼 토크는 ‘기계적 중립성’을 고수하는 전통 언론의 대안으로도 여겨진다. 노아는 “트럼프의 인종차별적이고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은 클린턴의 사설 이메일 사용과는 비교도 안 되게 위험하다”며 “언론은 중립성이 아니라 ‘진실이 무엇이냐’에 신경 써야 한다”고 타임지에 말했다.
정지용 기자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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