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한 차림새의 노신사가 먼저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분주한 카메라들 뒤쪽 조명도 비추지 않는 곳을 찾아가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곧이어 이날의 주인공이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연단에 등장했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진다. 노신사는 그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다정한 눈길로 바라봤다. 피아니스트 백건우(70)다. 배우 윤정희(72)의 데뷔 5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 백건우의 연주 여행에 아내 윤정희가 늘 함께하듯, 이날은 남편 백건우가 윤정희의 그림자가 되어 곁을 지켰다.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이 22일부터 내달 2일까지 윤정희 데뷔 50주년 특별전을 마련했다. 데뷔작 ‘청춘극장’(1967)부터 ‘안개’(1967) ‘무녀도’(1972) ‘화려한 외출’(1977) ‘만무방’(1994) 그리고 최근작 ‘시’(2010)까지 시대별 대표작 20편이 상영된다. 22일 개막식에 참석한 윤정희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큰 기쁨”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윤정희는 문희, 남정임과 더불어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붐을 일으키며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50년간 출연한 영화는 총 330여편. 이창동 감독의 ‘시’로 미국 로스앤젤레스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과 필리핀 시네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프랑스 문화예술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임권택 이만희 신상옥 이창동 감독 등 당대 대가들과 호흡을 맞춘 윤정희의 필모그래피는 그 자체로 한국영화의 역사다.
지나온 50년을 돌아보며 윤정희는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청춘극장’을 첫 손에 꼽았다. 김래성 작가의 동명 원작소설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던 터라 주연배우를 뽑는다는 기사를 보고 한달음에 지원했다고 한다. 윤정희는 특별전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이 영화를 50년 만에 다시 마주하며 “참 행복하다”고 했다.
은막 뒤로 물러난 동세대 배우들과 달리 윤정희는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하늘나라로 가는 그날까지 카메라 앞에 설 수 있기를 꿈꾼다”고도 말했다. “지금도 좋은 시나리오를 기다리고 있어요. 제 나이에 맞는, 그리고 인생의 고민을 담고 있는 영화라면 좋겠어요. 거기에 러브신도 있으면 더 좋겠죠.(웃음) 그런 작품을 만난다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프랑스)파리에서 날아올게요.”
윤정희가 영화를 꿈꿀 수 있는 힘은 가족이다. 윤정희의 눈길이 다시 카메라 뒤편 백건우에게로 향했다. “제 남편이 저보다도 영화를 좋아해요. 우리 딸(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은 제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갈 때 데려갈 정도로 영화전문가예요. 가족 덕분에 제가 영화를 계속할 수 있었어요. 저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에요.”
윤정희를 축하하기 위해 팬클럽 회원 100여명도 이날 개막식을 찾았다. 윤정희는 올드팬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기꺼이 함께 사진을 찍고 어울렸다. 잔잔하지만 뜨거운 환호가 윤정희를 뒤따랐다. 그 모습을 백건우가 멀리서 카메라로 담았다. ‘축하드린다’고 인사를 건네자 백건우가 흐뭇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윤정희가 수줍게 웃으며 살짝 귀띔했다. “내가 너무 소녀 같나 봐. 남편이 만날 놀려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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