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탄에 빠진 민생에 무감각한 집권세력을 보면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승만 독재가 극에 달했던 1956년에 치러진 정ㆍ부통령 선거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민주당 구호는 대박을 쳤다. 민심과 달리 선거결과는 부정선거를 자행한 자유당의 승리로 끝났다. 민주당 집권은 4ㆍ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고 나서야 실현되었다. 그런데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고 외쳤던 민주당이 집권했는데도 민생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유당의 구호처럼 ‘갈아 봤자 별수 없었다’.
한국 정치사는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 염원이 ‘갈아봤자 별수 없다’는 낙담으로 변한 사례들로 가득 차있다. 박정희 독재의 몰락은 전두환 독재로 이어졌고, 1987년 민주화 항쟁은 독재의 공범이었던 노태우를 당선시켰다. 김대중 정권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를 이루고, 복지의 물고를 열었지만, 구조조정을 일상화시키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등 신자유주의를 심화시켰다. 민주당 정권 10년 동안은 역설적이게도 주택가격은 폭등하고 불평등이 증가했다. 경제성장으로 민생을 해결하겠다던 새누리당이 집권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다.
수십 년 동안 정권교체가 낙담으로 변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국민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난 4월 총선에서 국민은 기성 정치세력을 심판했다. 새누리당은 패배했고, 더민주는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을 잃었다. 변화를 갈망했던 국민은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었다. 그래도 기성 정치는 변하지 않았다. 국민의 삶도 나아지지 않았다. 기대는 또다시 낙담으로 변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17년 대선이 다가오고 있다. 최대 야당 더민주 유력 대선후보들이 저마다 선거캠프를 꾸리고 전문가들을 모으고 있다. 국민을 위한 좋은 정책을 만들어보려는 욕심일 것이다. 그런데 좋은 정책을 만든다고 국민이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좋은 정책이 없어서 국민의 기대가 낙담으로 변한 것일까. 국민에게 대선은 단순히 좋은 정책을 선택하는 장이 아니다. 국민에게 대선은 자신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을 실현할 힘 있는 정치세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당내 경선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세력 구도에서 치러지는 더민주의 경선은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 특정인으로 후보가 사실상 내정된 상황에서 경선이 국민을 위한 정책을 겨루는 치열한 각축장이 될 가능성은 없다. 반대를 위한 반대와 정치 공학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은 익숙하다. 주류와 비주류 간에 표를 동원하는 싸움이 되고, 인신공격이 난무한 진흙탕 싸움이 된다. 지지 세력을 확장해야 할 경선이 지지 세력을 분열시키는 과정이 된다. 결과는 민심과 유리된 당내 다수파의 후보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출된 후보가 치르는 본선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식의 선거가 되고, 설령 정권교체가 된다고 해도 국민의 기대는 또다시 ‘갈아봤자 별수 없다’라는 낙담으로 변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국민의 조직된 힘과 요구를 모으지 못한 단순한 정권교체로는 해방 이후 누적된 한국사회의 강고한 불평등과 기득권 구조를 해체할 수 없다. 결국 기득권 세력을 제외한 모두가 패자가 된다.
더민주가 진정으로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면 내정된 후보를 확정하는 경선이 아니라 정책경선이라는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한다. 결과가 뻔한 경선에 최선을 다할 후보도, 그런 경선에 관심을 가질 국민도 없다. 박원순 안희정 이재명 김부겸이 자신의 정책 비전으로 “나도 후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경선을 만들어야 한다. 당내 경선이 정책경선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2017년 대선이 또다시 ‘갈아봤자 별수 없다’는 자유당의 저주가 재현될까 두렵다. 그런 대한민국에는 희망이 없다.
윤홍식 인하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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