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과 황정민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주지훈이 거들고 곽도원이 합류했다. 여기에 ‘비트’(1997)와 ‘태양은 없다’(1999)로 1990년대 후반 충무로의 준봉으로 솟았던 김성수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 스크린에 떠오르는 이름들만으로도 묵직하고도 묵직한데 제목까지 강렬하다. 인간계와 축생계 사이에 있는, 모두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지옥 아수라도에서 따왔다. 말보다 주먹이 빠르고 주먹보다 칼을 더 선호할 듯한 수컷들의 아비규환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가을 극장가를 장식할 기대작으로 꼽혀 온 영화 ‘아수라’가 21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 멀티플렉스에서 열린 언론시사회를 통해 실체를 첫 공개했다.
‘아수라’는 네 인물을 주요 축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인구 40만명 가량의 중소도시 안남시의 시장인 박성배(황정민)는 두 얼굴의 인물이다. 시민을 위해 열심히 뛰겠다고 외치면서 자신의 야욕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박성배의 하수인이자 매제인 형사 한도경(정우성)은 본업보다 박성배 뒤치다꺼리에 바쁘다. 성배의 이복동생인 자신의 아내가 불치병에 시달리니 병원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뒷골목을 전전한다.
살인교사로 기소된 성배는 도경이 증인을 협박한 덕에 무죄 판결을 받아내고, 다혈질에 교활하기까지 한 검사 김차인(곽도원)은 도경을 압박해 증거를 확보하려 한다. 도경이 실수로 동료 형사를 죽이게 되고, 도경의 단짝인 후배 형사 문선모(주지훈)가 성배의 수행팀장이 되면서 인물들은 폭력의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28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다섯 개 만점 기준, ☆는 반 개.
차고 넘치는 폭력의 향연
무지막지한 폭력 장면이 바통을 주고 받으며 132분 동안 이어진다. 마치 세상엔 인정도 동정도 연민도 피도 눈물도 사랑도 없다는 것을 방증하려는 듯 서로를 속이고 폭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이 스크린을 채우며 ‘비명도시’를 완성한다. 시속 100㎞를 달리다가 액셀러레이터를 더욱 세게 밟으며 기어이 시속 200㎞에 도달하려는 스포츠카에 동승한 기분이다. 지옥도가 숨쉴 틈 없이 펼쳐지면서 피비린내 섞인 냉기에 몸이 차가워진다.
관객의 예상을 뒤집으며 직진을 거듭하는 이야기 전개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폭력은 그저 잔인함 이상의 정서를 전하지 못한다. 인물들의 비정이 빚어내는 회한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회비판적 요소를 지녔는데 공명이 크지 않다. 빼어난 세공술로 빚어낸 차량 추격 장면 등 눈동자가 커질 만한 영상미는 박수 받을 만하다.
황정민의 명연이 가장 큰 동력이다. 자신을 기소한 부장검사에게 “니들 시대가 어느 땐데 힘 자랑이야”하고 이죽거리며 윽박지를 때, 자신에게 조언하는 도경에게 “니가 그런 판단하고 그러지마. 명령하는 것처럼 들리잖아”라며 달래듯 협박할 때, 검찰 조사를 조심하라는 도경에게 “나 겁 많어, 겁주지 말란 말이야”라며 너스레 아닌 너스레를 떨 때 관객은 악랄하면서도 교활하고 이기적이면서도 야심에 찬 악마적 인물 성배와 마주하게 된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황정민의 호연만 돋보인다
지옥 같은 세상이다. 밑도 끝도 없는 폭력이 난무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다. 개발되지 않은 후미진 회색 도시는 악인들이 판을 치는 소굴로 묘사된다. 그 안에는 법도 도덕도 가치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권력과 절대 악만이 남아 있다.
영화 ‘아수라’는 권력이 만들어낸 먹이사슬에 갇힌 도경을 통해 타락한 인간 세상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여념이 없다. 말기 암 환자인 아내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 성배의 충견 노릇을 하는 도경의 일상은 고달프기만 하다. 그럴수록 도경은 더 독해지고 악다구니만 해댄다. 영화는 부동산 개발 비리, 살인교사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악의 축’ 성배를 중심으로, 그를 잡으려는 검사 차인을 등장시켜 도경을 흔든다.
충견에서 점점 형사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듯한 도경의 알 수 없는 속내는 정우성의 연기만큼이나 어정쩡하고 밋밋하다. 영화 ‘비트’로 10대의 반항과 ‘태양은 없다’로 20대의 야망을 그리며 한국사회 남자들의 비애를 드러냈던 김성수 감독과 정우성의 조합은 ‘아수라’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 악행만 있고 메시지는 찾을 수 없는 줄거리에 관객을 밀어 넣고 자극적인 폭력에 노출시킨다. 칼이나 도끼, 톱, 총 등 온갖 무기들이 육체를 찢고 갈길 뿐이다. ‘국제시장’의 아버지와 ‘베테랑’의 형사를 깨끗이 지운 황정민의 호연만 눈길을 잡는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연기 열전’ 보는 재미는 상당
관객에게 일말의 동정심도 허락하지 않는 영화다. 아귀다툼의 이유가 탐욕이든 신념이든 생존이든 그 의도와 목적이 악하다. 자비와 용서, 긍휼은 ‘아수라’의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다. 악과 악이 얽히고 부딪히는 이야기가 꽤 신선하다.
폭력 묘사에도 자비는 없다. 총탄의 궤적은 선혈로 그려지고, 칼부림은 어김없이 처절한 상흔을 남긴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건조하고도 냉정한 시선으로 폭력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 움찔움찔 놀라게 되는 장면이 많다. 저절로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잔혹한 장면에 불편함을 느낄 관객도 많을 듯싶다.
내러티브는 약하다. 악덕 시장의 해결사 노릇을 하다 검찰의 정보원 노릇까지 하게 된 비리 형사 도경의 딜레마를 영화는 면밀히 살피지 못한다. 심리 묘사의 빈 공간은 액션에서 충당하지만 힘이 달린다. 돋보이는 건 주인공부터 단역까지 모조리 악인인데도 캐릭터가 겹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쓰임새 없이 배경으로 존재하는 인물도 없다. 캐릭터들의 탄탄한 짜임새는 배우들의 빛나는 연기 덕분이다. 연기 열전을 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자해 소동까지 벌일 정도로 악랄한 성배를 연기한 황정민과 소시민적인 악인이 된 정우성의 호흡이 특히 좋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악의 굴레가 부조리한 세상의 한 단면 같다. 한번 올라타면 스스로의 힘으론 내려올 수 없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은유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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