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9월 21일

1945년 해방 이후 6ㆍ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 5년은 분단ㆍ정부수립과 권력을 둘러싼 뭇 정파의 대립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여운형이 암살된 47년 여름은 특히 격렬해 7월 한 달간 128건의 테러가 발생하여 36명이 숨지고 385명이 부상 당했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에서 재인용) 테러는 좌ㆍ우익 모두 자행했지만, 우익 테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 배후에 경찰 조직이 있어서였다. 더 배후에는 친일파와 우익 정치인들이 있었고, 그 핵심에 이승만이 있었다. 서북청년회(약칭 ‘서청’)는 가장 막강한 우익 테러집단이었다.
서청은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들의 지역별 조직이 통합해 46년 11월 발족했다. 그들은 반공 행동대로 좌익 단체 사무실과 행사 등을 습격하는 등 폭력을 일삼았다. 그 조직의 활동자금을 김구 이승만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장택상 조병옥 등 한민당 정치인들이 댔다. 돈과 세력을 더 차지하기 위한 우익 단체들끼리의 테러도 적지 않았다.
대동청년단은 그 끝에, 47년 9월 21일 창설됐다. 서청의 세가 이승만에게로 기울자 김구가 갓 귀국한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내세워 우익 대동단결을 기치로 결성한 단체였다. 서청은 대동청년단 합류파와 잔류파(일명 재건파)로 나뉘었고, 재건파는 사실상 이승만의 친위대 노릇을 했다. 재건파 리더 문봉재는 서청의 정신적 배후로 이승만을 꼽았다.(강준만 책, 2권 53~54쪽) 이승만은 서청 잔류파와 별도로 48년 2월 구국청년총연맹을 결성했다.
폭력은 돈과 권력을 추종한다. 대동청년단은 48년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갈등 속에 분열하면서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에게로 기울었고, 48년 정부수립 후 역시 이승만이 조직한 대한청년단으로 흡수됐다. 하지만 이념과 지역의 두 거멀못으로 묶인 서청의 생명력은 더 끈질겨 48년의 제주 4.3 학살과 그 이후까지 악행이 이어졌다. 49년 6월 김구를 학살한 안두희 역시 서청 재건파 출신이었다.
애써 이승만의 공로를 찾자면 저 혼란의 폭력과 살인의 아수라장을 정리, 상대적인 안정을 회복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그 안정은 야만적인 테러의 독점으로 얻은 안정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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