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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영결식 "고향 땅 원산서 고이 잠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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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영결식 "고향 땅 원산서 고이 잠드시길"

입력
2016.09.2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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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최일남씨가 20일 저녁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이호철 작가 영결식에서 개식사를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소설가 최일남씨가 20일 저녁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이호철 작가 영결식에서 개식사를 하고 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선생님께서는 소설 ‘탈향’을 쓰셨지만 끝내 귀향의 소설은 쓰지 못하셨습니다. 꿈에 그리던 귀향은 못해도 그리워하던 가족은 만나셨겠지요. 탈향으로 시작된 선생님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였습니다. 두 번의 옥고와 그로 인한 육체적 심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더욱 당당해지는 모습을 후배들은 보았습니다. 이승에서의 힘든 추억은 잊으시고 부디 영면하시길 바랍니다.”(소설가 박충훈)

20일 오후 7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열린 이호철 작가 영결식에는 선후배 문인 수십 명이 참석했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소설가 김승옥, 김원호, 전성태씨, 시인 신경림, 김정환, 구중서씨 등이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건강 때문에 근래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소설가 최인훈씨도 지인의 부축을 받아 자리를 지켰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소설가 최일남씨는 개식사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문학단체와 예술원이 합동으로 주관해 장례식을 치른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고인이 한국의 역사를 온 몸으로 실천하신 분이란 걸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고 말했다.

1985~87년 고인이 현 한국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회 대표를 맡았을 때 곁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김정환 시인은 ‘강’이라는 제목으로 조시를 발표했다. 박찬숙 전 국회의원은 1980년 언론인 해직사태 때 할 일이 없어 언론사 문화센터 소설창작반을 찾았다가 고인을 처음 만난 일을 추억했다. 박 전 의원은 “선생님은 늘 통일이 별 게 아니라 만나는 것, 같이 밥 먹는 게 통일이라고 하셨다”며 “아마도 남녘 사람들의 말을 북녘 사람들에게 빨리 전하고 싶어서 고향 땅으로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한다. 고이 잠드시길 빈다”고 말했다.

18일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고인은 한국 분단문학의 개척자이자 거장으로 불렸다. 1974년 ‘문학인 61인 개헌지지 선언’ 때 고인과 함께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던 황석영 소설가는 저서 ‘한국명단편 101’에서 당시의 이호철을 “좌장이었고 ‘큰 형님’”으로 기억한다. “염무웅의 표현대로는 ‘천진난만’이었고, 한남철의 표현으로는 ‘주책없음’이었다. 방영웅의 표현에 의하면 ‘늘 틀리는 낌새’였으며, 이문구의 표현에 의하면 ‘소심한 인정주의’였고, 내가 보기에는 ‘삐지기 잘하지만 얼른 풀어버리는 호인’이었다.”

원산에서 태어난 이호철은 어린 시절부터 김소월의 시와 이광수의 소설을 접하며 문인의 꿈을 키웠다. 고교 3학년 때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인민군으로 동원돼 경북 울진에서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매형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1ㆍ4 후퇴 때 혈혈단신 남하해 부산 등지에서 국수공장 견습공 등으로 일하면서 소설 습작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마침 해군 정훈장교로 있던 소설가 염상섭을 통해 황순원을 만난 이호철은 서울로 올라와 황순원에게 지도를 받고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판문점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소설 ‘판문점(1961)’을 쓰기도 한 이호철(왼쪽) 작가가 남북 대화가 재개되던 1960년대 중반 다시 판문점을 방문해 당시 취재 기자와 함께 찍은 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판문점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소설 ‘판문점(1961)’을 쓰기도 한 이호철(왼쪽) 작가가 남북 대화가 재개되던 1960년대 중반 다시 판문점을 방문해 당시 취재 기자와 함께 찍은 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가 남긴 수십 편의 작품 중에서도 1961년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소설 ‘판문점’은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남한의 백수 청년 진수가 판문점을 구경하러 떠나는 내용으로, 민족 분단의 비극을 남북 젊은이 간의 미묘하게 어긋나는 대화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기자로 신분을 속이고 외국인 기자들과 함께 판문점에 도착한 진수에게 붉은 완장을 찬 북쪽 여기자가 말을 건다. 두 사람이 합의점 없는 논쟁을 이어가던 중 소나기가 쏟아지고 진수와 여기자는 남인지 북인지 소속이 불분명한 지프차로 들어간다. 조용한 차 안에서 이데올로기의 무거움은 우스워지고 서로가 그저 한 명의 인간임을 확인하지만, 비는 곧 그치고 두 사람은 각자 남과 북으로 향한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세대’에 연재한 장편소설 ‘소시민’에서는 뛰어난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부산 완월동 제면소를 배경으로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서술한 이 작품은, 실향, 분단, 가족 해체, 불신과 이기주의 등 당대의 아픔을 개개인의 삶을 통해 섬세하게 드러낸 수작이다. 작가가 제면소 주인 내외와 피난민들에게 붙인 ‘소시민’이란 단어는 시대의 정신적 징후를 통칭하는 말로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1996년 낸 ‘남녘 사람 북녘 사람’도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1986년부터 약 10년 간 발표한 연작소설 ‘남에서 온 사람들’ ‘짙은 어둠 속 질주’ ‘남녘 사람 북녘 사람’ 등 여섯 편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1950년 국군 포로로 잡혔을 때의 경험담을 비롯해 작가 자신의 삶과 경험을 소설에 녹여냈다. 폴란드, 일본, 독일, 프랑스 등 전세계 10개국으로 번역 출판됐다.

고인은 2001년 소설집 ‘이산타령 친족타령’, 2011년 소설집 ‘가는 세월과 흐르는 사람들’ 등 후기 작품에서도 통일과 민족에 꾸준히 관심을 보였다. 고인은 2014년 독일 베를린 한국문화원 낭독회에 참석해 “통일이 빨리 되면 더 어려워진다”며 “남북이 서로 드나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통일이 되는 것이지, 억지로 통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통일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소설가 이호철(왼쪽)씨가 그 해 10월 서울구치소 정문을 나서며 기다리던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소설가 이호철(왼쪽)씨가 그 해 10월 서울구치소 정문을 나서며 기다리던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례는 대한민국예술원, 한국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등 5개 단체가 합동으로 치르는 ‘대한민국 문학인장’으로 치러졌다. 발인은 21일 오전 5시이며 시신은 광주광역시 국립5ㆍ18민주묘지에 안장된다.

2013년 1월 ‘판문점’ 속편 출간기념간담회에서 이호철 소설가의 모습. 그는 “북한에서 살았던 작가로서 그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작가들이 쓴 소설은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2013년 1월 ‘판문점’ 속편 출간기념간담회에서 이호철 소설가의 모습. 그는 “북한에서 살았던 작가로서 그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작가들이 쓴 소설은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이호철 연보

*‘남녁사람 북녘사람’ ‘판문점’ 등 대표작 미국 일본 독일 등 10개국어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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