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로 유명한 뉴욕 맨해튼의 브로드웨이 구역 서쪽으로 소위 ‘오프 브로드웨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예술성을 추구하면서도 흥행성을 갖춘 작품이 공연되는 소극장들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 중 플레이라이츠 호라이즌스 소극장에서 9월부터 상영 중인 연극 ‘오버진(Aubergine)’은 음식에 대한 추억을 매개로 재미 한인 가족 이야기를 그려낸다. 프랑스어로 채소 ‘가지’를 뜻하는 오버진은 한인2세인 극작가 줄리아 조의 작품으로 캘리포니아주 버클리 랩 극장에서 올 2월 첫 선을 보인 후 뉴욕에 상륙했다.
줄리아 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였을 때 20페이지 단막극 집필을 제안 받고, 아버지가 가장 즐겨 드셨던 음식인 인스턴트 라면에 대한 추억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단막극에 살을 덧붙여 탄생한 ‘오버진’은 누구든 가지고 있을 법한 소소한 음식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가장 먹먹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연극이다.
연극은 어느 여자의 음식에 대한 추억을 되짚으며 시작한다. 남편과 미식 여행을 다니며 일류요리를 음미하던 기억들을 되새기지만, 정작 그녀에게 가장 강렬하고 애잔한 추억은 아픈 아버지가 수술 전날 한밤중에 딸을 위해 만들어준 샌드위치였다. 빵, 고기, 버터밖에 넣지 않은 간단한 샌드위치지만, 아버지가 프라이팬에 녹이던 버터 향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극의 메인 플롯은 코마상태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돌보게 된 셰프 아들의 이야기다. 음식이 단순히 살기 위한 열량 공급 수단이었던 아버지와 끊임없이 맛을 추구하는 길을 선택한 셰프 아들. 극은 그들이 이민가족으로 살아온 과거와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현재를 오가며, 부자간의 갈등을 음식에 대한 추억과 엮어 잔잔하게, 때로는 유머로, 때로는 허를 찌르는 진실로 풀어나간다. 아버지가 한국을 떠나며 먹었던 뭇국은 그 자체로는 보잘것없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의 상징이다. 온갖 화려한 음식을 요리할 수 있는 아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아버지에게 진심을 담아 바치는 음식은 라면이다. 주변 인물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삶을 통해서도 음식에 대한 추억이 얼마나 강력한지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
아버지의 간병인이 말해주는, 그가 어릴 적 먹었던 고기와 채소가 듬뿍 든 수프와 훗날 난민 수용소에서 배식 받은 멀건 수프는 음식 이상의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소소하게 지나쳐가는 일상의 기억에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멋들어진 일류요리보다 수수한 나날의 먹거리가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다. 음식에 대한 추억으로 엮어진 오감의 기억은 더 넓게, 더 깊이 다가오고, 한국인 이민 가정의 이야기를 뛰어 넘어 가족과 음식에 대한 추억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극장의 2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연극이 끝난 후 진행된 줄리아 조 작가와 케이트 오리스키 감독과의 대화에서 이 연극이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공유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들은 최근 아버지를 여의고 또는 가까운 친구를 잃고 이 연극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들이 기억하는 음식에 대한 추억을 들으며 이 연극은 더 이상 한국인 이민가정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극의 중간중간 연결되는 한국어 대화는, 때로는 한국말이 서툰 아들이 느끼는 당황스러움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며 유머의 포인트가 되었고, 때로는 매끄러운 자막 처리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감동을 주었다. 어떤 관객은 분명 자막으로 읽었는데도 그 대사를 들은 걸로 기억된다고 할 정도로, 한국어 대사도 극의 흐름에 리얼리티를 더하며 몰입을 도왔다.
되돌아 보는 삶의 중요한 순간 순간은 항상 음식에 대한 추억을 동반한다. 때로는 쓸데없고 자잘하게 느껴지는 일상까지도 음식과 함께 이어나가며 소중한 삶의 일부임을 깨닫게 해주는 이 연극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먹먹한 감동을 이끌어내며 오래 여운을 남긴다.
반찬스토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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