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경의 반려배려]
‘에스더에게. 4년 전 우리는 너를 처음 보았지. 작은 귀와 분홍색 발톱을 잊을 수가 없단다. 사람들이 돼지들에게 한 끔찍한 일들, 또 가족을 만날 기회조차 주지 못한 것에 대해 너무 미안하구나. 똑똑하고 감성적인 동물이라는 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는 한낱 저녁거리일 뿐이겠지.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웃게 해줘서 고마워. 포옹과 키스를 담아 사랑하는 아빠가.’
캐나다에 사는 스티브 젱킨스가 최근 반려돼지 ‘에스더’에게 쓴 편지 내용의 일부다. 젱킨스 가족은 미니피그인 줄 알고 입양한 새끼돼지가 일반돼지로 밝혀졌지만 같이 살기를 포기하는 대신 버림받은 농장동물을 돌보는 보호소를 지었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북미에선 미니피그를 반려돼지로 입양하는 가족도 많고, 또 일반돼지로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반려돼지 에스더는 이제 80만명의 팬을 확보한 페이스북 스타다.
에스더의 사연을 보면서 애니메이션 영화 ‘터키’가 떠올랐다. 칠면조들이 추수감사절에 빠지지 않는 칠면조 요리를 없애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첫 추수감사절 직전으로 돌아가 종족을 구출하고 칠면조를 명절에 먹지 않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다소 황당한 줄거리이긴 하지만 칠면조가 식탁에 오르기 위해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공장식 사육공간에서 평생 지내야 하는 점 등을 알기 쉽게 표현해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돼지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이나 칠면조가 종족을 구출한다는 영화 내용은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우리에게 돼지와 닭은 대형 마트에 포장되어 있는 붉은 생고기나 노릇노릇하게 튀겨져 있는 음식으로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농장 동물들이 이렇게 가공되고 음식이 되기 전까지 겪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또 동물원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먹는 돼지나 닭들이 어떻게 대규모로 사육되는지 직접 본 이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동물복지축산 인증을 받은 경기 이천의 성지농장이라는 곳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돼지들은 물웅덩이에서 목욕하고 방목장 안을 뛰어다녔다. 꼬물거리는 새끼돼지들은 너무나 귀여웠다.
하지만 이렇게 사육되는 돼지는 1%뿐이다. 나머지 99% 돼지들은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농장에서 갇혀 살고 있다. A4용지 절반 크기의 ‘배터리 케이지’에 갇혀 알을 낳는 산란계, 밀집된 공간에서 30일 만에 도축되는 육계의 사육환경은 더 처참하다.
농림축산검역본부는 2012년부터 동물복지 기준에 따라 인도적으로 동물을 사육하는 곳을 동물복지 농장으로 인증하고 있다. 밀집 사육되는 동물들의 경우 면역력이 떨어져 폭염이나 조류 독감(AI), 구제역 등에 취약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를 먹는 사람들의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다.
20일에는 경기 안성의 제1호 동물복지 젖소 농장이 탄생했다. 이로써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곳은 산란계 85곳, 돼지 12곳, 육계 8곳, 젖소 2곳(1명의 농장주가 운영)이 됐다. 영국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는 이미 동물복지 인증제도가 활성화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은 걸음마 단계다. 동물복지 농장제가 활성화되려면 현재 축산 시스템을 바꾸는 농장주들의 과감한 결단과 다소 비싸더라도 동물복지 상품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어나야 한다.
삼겹살과 치킨을 먹기 전, 가족의 식탁에 오르는 달걀이나 우유를 고르기 전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고은경기자 scoopk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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