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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소설가 빈소에 문인들 조문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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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철 소설가 빈소에 문인들 조문 이어져

입력
2016.09.2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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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가운데) 시인이 1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소설가 이호철 빈소에 조문한 뒤 유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신경림(가운데) 시인이 19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소설가 이호철 빈소에 조문한 뒤 유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이호철 소설가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19일에 이어 20일에도 선후배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장례위원장을 맡은 최일남 소설가를 비롯해 신경림 시인, 최원식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문효치 문인협회 이사장, 문학평론가 염무웅, 시인 김남조, 이시영, 유안진, 소설가 김승옥, 한말숙,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이재오 전 의원 등이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억했다.

18일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고인은 한국 분단문학의 개척자이자 거장으로 불렸다. 1974년 ‘문학인 61인 개헌지지 선언’ 때 고인과 함께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던 황석영 소설가는 저서 ‘한국명단편 101’에서 당시의 이호철을 “좌장이었고 ‘큰 형님’”으로 기억한다. “염무웅의 표현대로는 ‘천진난만’이었고, 한남철의 표현으로는 ‘주책없음’이었다. 방영웅의 표현에 의하면 ‘늘 틀리는 낌새’였으며, 이문구의 표현에 의하면 ‘소심한 인정주의’였고, 내가 보기에는 ‘삐지기 잘하지만 얼른 풀어버리는 호인’이었다.”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이호철은 어린 시절부터 김소월의 시와 이광수의 소설을 접하며 문인의 꿈을 키웠다. 러시아, 프랑스 문학에도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인민군으로 동원돼 경북 울진에서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매형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1ㆍ4 후퇴 때 혈혈단신으로 남하해 부산 등지에서 국수공장 견습공 등으로 일하면서도 소설 습작에 매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마침 해군 정훈장교로 있던 소설가 염상섭을 통해 황순원을 만난 이호철은 서울로 올라와 황순원에게 지도를 받았고, 그의 추천으로 1955년 ‘문학예술’에 단편소설 ‘탈향’을 발표했다. 이듬해 두 번째 추천작 ‘나상’을 발표하며 등단해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판문점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소설 ‘판문점(1961)’을 쓰기도 한 이호철(왼쪽) 작가가 남북 대화가 재개되던 1960년대 중반 다시 판문점을 방문해 당시 취재 기자와 함께 찍은 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판문점 방문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소설 ‘판문점(1961)’을 쓰기도 한 이호철(왼쪽) 작가가 남북 대화가 재개되던 1960년대 중반 다시 판문점을 방문해 당시 취재 기자와 함께 찍은 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장편소설 ‘소시민’ ‘서울은 만원이다’ ‘남풍북풍’ ‘門’ ‘그 겨울의 긴 계곡’ ‘재미있는 세상’ ‘판문점’ ‘닳아지는 살들’, 중단편소설 ‘퇴역 선임하사’ ‘무너지는 소리’ ‘큰 산’ ‘나상’, 연작소설 ‘남녘사람 북녘사람’ 등 수십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1961년 ‘사상계’에 발표한 단편소설 ‘판문점’은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판문점’은 남한의 백수 청년 진수가 판문점을 구경하러 떠나는 내용으로, 민족 분단의 비극을 남북 젊은이 간의 미묘하게 어긋나는 대화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이다. 기자로 신분을 속이고 외국인 기자들과 함께 판문점에 도착한 진수에게 붉은 완장을 찬 북쪽 여기자가 말을 건다. 두 사람이 합의점 없는 논쟁을 이어가던 중 소나기가 쏟아지고 진수와 여기자는 남인지 북인지 소속이 불분명한 지프차로 들어간다. 조용한 차 안에서 이데올로기의 무거움은 우스워지고 서로가 그저 한 명의 인간임을 확인하지만, 비는 곧 그치고 두 사람은 각자 남과 북으로 향한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세대’에 연재한 장편소설 ‘소시민’에서는 뛰어난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인 부산 완월동 제면소를 배경으로 다채로운 인간군상을 서술한 이 작품은, 실향, 분단, 가족 해체, 불신과 이기주의 등 당대의 아픔을 개개인의 삶을 통해 섬세하게 드러낸 수작이다. 작가가 제면소 주인 내외와 피난민들에게 붙인 ‘소시민’이란 단어는 시대의 정신적 징후를 통칭하는 말로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후기 작품들에서도 분단과 통일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지속됐다. 2001년 소설집 ‘이산타령 친족타령’을 발표했으며, 2011년 발표한 소설집 ‘가는 세월과 흐르는 사람들’에서는 중국과 러시아동포에까지 관심사를 넓혔다. 고인은 2014년 독일 베를린 한국문화원 낭독회에 참석해 “통일이 빨리 되면 더 어려워진다”며 “남북이 서로 드나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통일이 되는 것이지, 억지로 통일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통일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소설가 이호철(왼쪽)씨가 그 해 10월 서울구치소 정문을 나서며 기다리던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투옥됐던 소설가 이호철(왼쪽)씨가 그 해 10월 서울구치소 정문을 나서며 기다리던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고인은 유신독재가 맹위를 떨쳤던 1970, 80년대 반독재민주화 투쟁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1971년 재야단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운영위원으로 참여한 그는 유신헌법 개헌 반대 서명을 주도했다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문인간첩단 사건은 법원의 재심으로 2011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려 정보당국의 남산 지하실에 두 달 간 갇혀 있다가 군사재판을 거쳐 풀려나기도 했다. 1985~87년에는 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를 맡았으며 1987년 ‘6월항쟁’ 기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시위에 참여했다.

고인의 장례는 대한민국예술원, 한국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한국소설가협회 등 5개 단체가 합동으로 치르는 ‘대한민국 문학인장’으로 엄수된다. 20일 오후 7시에 열리는 영결식에는 고은, 백낙청, 이어령, 김남조 등 생전에 고인과 친했던 문단 인사들이 참석하며 유안진 시인 등이 추모사를 낭독할 예정이다. 발인은 21일 오전 5시에 이뤄지며 시신은 광주광역시 국립5ㆍ18민주묘지에 안장된다.

2013년 1월 ‘판문점’ 속편 출간기념간담회에서 이호철 소설가의 모습. 그는 “북한에서 살았던 작가로서 그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작가들이 쓴 소설은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2013년 1월 ‘판문점’ 속편 출간기념간담회에서 이호철 소설가의 모습. 그는 “북한에서 살았던 작가로서 그 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작가들이 쓴 소설은 성에 차지 않는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hongik@hankookilbo.com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이호철 연보

1932년 원산 출생

50년 단신 월남해 부두노동자, 제면소 직공 생활

55년 ‘탈향’ 발표

61년 ‘판문점’ 현대문학상 수상

62년 ‘닳아지는 살들’ 동인문학상 수상

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

73년 개원청원 100만인 서명 발기인 참가

74년 국보법 위반으로 옥고

85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92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96년 ‘남녘사람 북녘사람’ 대산문학상 수상

98년 예술원상 수상

2012년 ‘판문점2’ 출간

‘남녁사람 북녘사람’ ‘판문점’ 등 대표작 미국 일본 독일 등 8개국어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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