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대비 효율 그리 높지 않아”
정부가 떠민 변화, 언제든 다시 원 위치로..
2014년 7월부터 올해 초까지 경제 수장을 맡은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재임 당시 현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로 불리며 수많은 혁신 과제를 밀어 붙였습니다. 그러나 불도저와도 같았던 최 전 부총리의 추진력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과제가 있었으니, 바로 오전 9시에 열어 오후 4시면 칼 같이 닫는 은행들의 점포 운영시간입니다.
“오후 4시면 문을 닫는 금융회사가 어디 있냐. 다른 나라는 금융회사들이 워킹아워(일반 근로자의 근무 시간)에 맞춰 일하고 있다.” 최 전 부총리가 지난해 10월 페루 리마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해 금융개혁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한 말인데요. 그러면서 그는 “일하는 시간을 늘리지 않아도 노사 합의에 따라 근무형태를 바꾸면 된다. 시대 변화에 맞는 금융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실세 부총리가 시중은행들에 업무 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하라는 강력한 지침을 내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최 전 부총리 발언이 1년 가까이 지난 현 시점에도 주요 은행의 점포 운영 시간엔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실세 중 실세’의 말발이 좀처럼 먹혀 들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라고 합니다.
우선 은행들은 오후 4시에 창구를 닫고 고객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일을 안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은행들은 보통 오후 4시를 기점으로 마지막 손님을 받은 이후 은행 문을 닫고 ‘마감 업무’를 보는데요. 그날 발생한 각종 주요 증서와 거래된 돈을 정리하는 일, 수표 교환 업무 등이 포함 됩니다. 마감 업무를 마치면 ‘부서 업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출 만기일이 가까워진 고객에게 안내 전화를 돌리는 일, 주요 거래를 튼 고객에게 전화를 돌리는 일 등 각종 마케팅 업무가 부서 업무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런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통상 오후 7시가 넘어야 퇴근을 할 수가 있다고 하는데요. 창구 열어두는 시간을 2시간 늘리면, 오후 9시나 돼야 퇴근을 할 수 있는 셈이니 은행원 입장에선 최 전 부총리의 발언이 반가웠을 리가 없습니다.
오후 4시 이후나 주말에 창구를 운영하면 부담이 되는 건 은행원뿐만이 아닙니다. 은행 경영진 입장에서도 인건비 부담이 커지게 됩니다. 2009년 은행권 노조와 경영진이 합의해 정한 은행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2009년 이전에는 오전 9시30분~오후 4시30분). 그리고 퇴근 시간은 종업(終業)시간 1시간과 점심 시간으로 활용한 1시간 등 2시간을 더한 오후 6시입니다.
은행 영업 시간에 변화를 주려면 노사 합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돈도 더 줘야 합니다.평일 야근의 경우 정상 근로시간 대비 1.5~1.6배의 수당을, 주말 근무의 경우 2배 가까운 수당을 지급해야 하는데요. 은행 경영진 입장에서도 탄력 근무는 비용 대비 효율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인 셈이죠.
다만 고객들이 필요에 따라 오랜 기간 관행으로 굳어져 온 은행 업무 시간 역시 중장기적으로는 조금씩 바뀔 것으로 보입니다. 맞벌이가 늘어난 데다가, 직장인들이 예전처럼 업무 시간에 잠시 짬을 내 은행을 들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죠. 실제로 일부 은행들은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산은행은 최근 공단 등 기업 밀집지역, 대형마트, 야시장 등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을 골라 트레일러를 개조해 만든 ‘이동 점포’를 오후 4시 이후부터 운영하고 있습니다. 부산은행 관계자는 “대출상담, 환전, 공과금 수납, 신용카드 개설 등 거의 모든 은행업무를 이런 이동점포에서 볼 수 있어서 고객이 상당히 많다”고 전했습니다. 그 밖에 시중은행들도 외국인 노동자가 밀집한 안산 지역 일부 점포의 경우 주말에 점포를 열어 외화 송금 업무 등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수요ㆍ공급의 논리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인데요. 정부가 떠밀어서 진행된 변화는 언제든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기 마련일 겁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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