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 못 만나지만 안전이 먼저”
연휴기간 여행 예약 취소도 급증
“정부 대응능력 불신 때문” 분석도
여동생과 서울에서 자취를 하는 대학원생 이모(24ㆍ여)씨는 13일 추석을 앞두고 부모님이 계신 대구로 가려고 예매한 KTX 기차표를 취소했다. 근처에 사는 할머니를 모시고 내려가려 지난달 17일 인터넷으로 추석 예매표를 힘겹게 구했으나 전날 밤 경북 경주시에서 발생한 강진 탓에 귀성을 포기한 것이다. 이씨 부모는 자매에게 “여진이 걱정되니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고령인 할머니도 지진 소식에 두려움을 많이 느껴 서울에 남기로 했다”며 “명절에 가족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은 크지만 안전이 먼저”라고 말했다.
닷새 간 이어지는 추석연휴를 목전에 두고 발생한 지진으로 고향방문 계획을 취소하거나 변경하는 시민들이 속출하고 있다. 경주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차라리 서울에 머물라고 권하고 있다. 대학생 곽모(24)씨도 이날 저녁 서울에서 출발하는 경남 사천행 버스표를 지진 발생 직후 취소했다. 곽씨는 “부모님이 지진이 완전히 멈추면 내려오라고 해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아내와 고향인 경남 밀양으로 가는 회사원 공모(32)씨는 KTX를 포기하고 버스를 선택했다. 그는 “지진 여파로 KTX 열차들이 정차하거나 서행한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탈선 사고 등이 우려돼 버스표로 바꿨다”고 말했다.
연휴를 맞아 남부지방으로 여행을 계획했던 이들은 예약을 급히 취소하고 있다. 경주 대명리조트 관계자는 “어제 지진이 일어난 직후 333개 객실 중 297개 객실 고객들이 전액 환불을 받고 되돌아갔다. 14,15일 예약분도 30~50%가 취소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취소한 예매표는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던 이들에게 돌아갔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김모(29)씨는 13일 새벽 고향인 부산행 열차표를 극적으로 구했다. 김씨는 “새벽 2시에 표가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오전 9시쯤 적당한 시간대를 골라 오늘 오후 표를 바로 예매했다”며 “1년 동안 고향을 찾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컸는데 떳떳하게 부모님을 뵐 수 있게 됐다”고 안도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12일 지진 발생 직후 취소표가 대거 풀렸지만 13일 오후가 되자 다시 매진됐다”며 “지진에 따른 열차운행 계획을 궁금해하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귀성포기 현상은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대한 공포와 함께 정부의 취약한 재난 대응능력에 대한 불신이 작용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귀옥 한성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민들의 불안감은 과민증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부실한 안전망을 다시 한 번 드러낸 지표”라며 “지진 자체보다 국민의 삶을 안전하게 만드는 시스템을 전혀 마련하지 못한 정부의 사후약방문식 조치가 더 큰 문제”라고 진단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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