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독재자가 영화광이다.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의 영화 후진성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수준 높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인력이 없다. 전쟁까지 치른 적대적 이웃 국가에는 눈에 띄는 영화감독과 배우가 있다. 독재자는 그들을 데려와서 자국 영화를 진흥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현대 국가라면 아무리 독재자라도 정중히 제안을 했을 것이다. 바라는 바와 조건을 내세워서. 하지만 왕조국가나 다름 없는 곳에서 왕세자 역할을 했던 독재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음에 둔 유명 감독과 배우를 납치한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20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벌어진다.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부부 납북 사건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는 냉전 시절 자유진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부부 영화인 납북을 스크린에 복원한다. 신 감독과 그의 전 부인 최은희가 납치된 과정을 자료사진과 영화 화면, 재현 장면 등으로 재구성하며 기괴하고도 야만적이고 흥미로움으로 가득 찬 사건의 진실을 전하려 한다.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신 감독과 최은희가 1978년 납치된 뒤 김정일을 만나고 북한 체제에 순응하는 척하며 영화를 만들다가 1984년 극적으로 서방으로 탈출하는 과정은 눈과 귀를 붙잡기에 충분하다. 최은희와 그의 아들과 딸, 최은희의 사촌동생,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인 비밀요원, 프랑스와 일본 영화평론가 등의 증언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촘촘한 진실의 그물망을 짜낸다. 억측과 풍문이 만들어낸, 두 사람 납치를 둘러싼 여러 오해가 무색해진다. 최은희가 핸드백에 몰래 숨긴 녹음기로 녹취한 김정일의 말들이 서늘한 기운을 전한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소재인데도 생동감이 넘치는 이유다.

영화는 김정일의 내면도 파악하려 한다. 거대한 집에서 장난감에 둘러싸인 채 외롭게 자라 영화에 푹 빠져버린 ‘고독한 왕자님’의 정신세계가 북한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분석한다. 신 감독과 최은희를 도약대 삼아 북한영화의 해외 진출을 꿈꾸고, 북한판 ‘타이타닉’까지 만들고자 했던 그는 국가경영자보다 억만장자 영화제작자의 풍모다. 최은희는 “신 감독이 북한에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 돈 걱정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일부 원로 영화인을 중심으로 신 감독의 자진 입북설이 떠돈다. 박정희 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미운 털이 박힌 신 감독이 새로운 영화 활동 공간으로 북한을 택했다는 것이다. 신 감독은 1974년 예고편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영화사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당해 납북되기 전 4년 동안 영화 연출을 하지 못했다. ‘연인과 독재자’는 김정일의 목소리를 통해 자진 입북설을 불식시킨다.
놀랍고도 민망하게도 이 영화의 감독은 영국인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애덤이다. 한국을 찾아 최은희를 2년 동안 만나고 설득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두 감독은 “이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캐넌과 애덤은 신 감독의 연출작과 최은희 출연작 화면을 활용해 납치 당시와 납북 뒤 두 사람의 심정을 표현해내는 연출력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더한다. 22일 개봉, 12세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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