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 전화를 가지고 있지만 나도 내 전화번호를 모른다. 엄마와 2, 3일에 한 번쯤 긴 통화를 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전화벨이 울리는 건 두 가지 경우다. 첫 번째는 엄마이고 두 번째는 여론조사. 그래서 나는 집 전화를 받을 때엔 “여보세요”라는 말 대신 “응”이라고 한다. 엄마면 응, 이라 해도 되고 여론조사라면 끊으면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려 여느 때처럼 “응” 하면서 받았는데 꼬마였다. “저 박슬기인데요, 우리 엄마 좀 바꿔주세요.” “니네 엄마?” “네” “니네 엄마 없는데?” “네?” “슬기야, 너 전화 잘못 걸었나 봐. 여기 니네 엄마 없어”.
그런데 이런. 꼬마가 운다. 흐엉흐엉 하면서. 요녀석, 우는 소리를 들으니 정말 귀여웠다. 곁에 있으면 꼭 껴안아주었음 싶었다. 아쉽게도 꼬마는 전화를 금방 끊어버렸다. 나는 오랫동안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끄럽고 번잡스럽다는 이유였다. 세월호 사고 이후부터 내 눈에 소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깡똥한 교복 치마 아래로 드러난 통통한 종아리가 그렇게 예쁠 수 없었고 복숭아빛 립틴트를 바른 입술도 예뻤다. 마을버스 안에서 종알종알 떠드는 목소리는 또 얼마나 귀여웠던지. 다녀올게, 밝게 인사하고 집을 나선 아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머리통이 어지러웠다. 추석 연휴다. 어린 젯밥 주인들의 안식을 기도한다. 슬기에게도 좀 더 다정하게 전화를 받을 걸. 니네 엄마 없어, 하지 말고 더 따뜻하게 말해줄 걸. 엄마 곧 오실 거야, 그렇게 말해줄 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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