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애 첫 차는 기아자동차의 ‘프라이드’(사진)였다. 결혼을 하면서 친구가 타던 프라이드를 중고로 샀다. 자동차 잡지사 기자 생활을 시작하며 그 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기아차의 자존심(프라이드)이었던 프라이드가 곧 나의 자존심이기도 했던 시절이다.
정부는 1985년 1월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수정안을 발표했다. 그간 정부가 자동차 업체 별로 생산 가능한 차종을 묶었지만, 87년부터는 생산차종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승용차 생산 기회를 엿보던 기아차는 곧바로 ‘Y카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소형 승용차를 3각 협력 체제로 생산한다는 게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이었다. 개발은 일본 마쓰다, 생산은 기아차, 미국 내 판매는 포드가 맡는 방식이었다. 부족한 기술과 자본, 시장을 3각 협력으로 해결해 국제 수준의 자동차 업체로 도약하겠다는 기아차의 전략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바로 프라이드다.
프라이드가 처음 발표된 건 87년이다. 미국에서는 ‘포드 페스티바’로 불렸고, 일본에서는 ‘마쓰다 121’이란 이름으로 팔렸다.
프라이드는 70마력을 발휘하는 1.1ℓ 가솔린 엔진과 78마력의 1.3ℓ 가솔린 엔진을 갖췄다. 변속기는 5단 수동과 3단 자동이 적용됐다. 초기에 기계식(카뷰레이터 방식) 엔진으로 시작해, 전자제어 방식의 엔진으로 발전해 나갔다.
프라이드의 등장으로 국내에서도 해치백(뒤에 위아래로 여는 문이 달린 차) 시장이 열렸다. 초기에는 “꽁지 빠진 닭”같다는 놀림도 받았지만 작은 크기에 상대적으로 효율적인 힘, 합리적인 가격 등은 차를 소유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좋은 대안이었다.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본격적인 자동차 대중화 시대를 여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소형 해치백으로 시작한 프라이드는 이후 다양한 차체로 진화했다. 트렁크를 확대한 세단형 ‘프라이드 베타’가 대표적인데, 마쓰다와 상관없는 독자개발 차였다. 기아차는 이어 지붕을 천으로 만든 ‘캔버스탑’ 모델, 대우자동차의 경차 ‘티코’에 대응하기 위한 ‘프라이드 팝’ 등 다양한 모델을 내놓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프라이드는 모터스포츠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많은 선수들이 프라이드를 타고 경기에 나섰을 정도다. 당시 모터스포츠에서는 기아차가 강세였다. 현대자동차 모델은 보기 힘들었다.
1세대 프라이드는 2000년 단종됐다. 한동안 잊혀진 이 차는 2005년 부활한다. 현대차그룹으로 편입된 기아차가 소형차 이름으로 다시 프라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쌍용자동차의 ‘코란도’처럼 기아차의 프라이드 역시 많은 이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차였기 때문이다. 오토다이어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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