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주먹들’이 다시 뭉쳤다.
홍수환(66) 한국권투위원회(KBC) 회장이 “아미고(스페인어로 친구)”를 외치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엑토르 카라스키야(56)도 홍수환을 반갑게 안은 뒤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홍수환은 9일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대치동의 한 복싱 체육관에서 지금은 파나마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인 카라스키야와 재회했다. 1999년 국내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이후 17년 만이다. 공공외교 전문기관인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초청으로 방한한 카라스키야의 요청으로 성사된 자리였다.
둘은 1977년 11월 26일 파나마에서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타이틀을 걸고 맞붙었다. 당시 18세의 카라스키야는 11전 11KO승을 기록하며 ‘지옥에서 온 악마’로 불렸다. 많은 전문가들은 홍수환이 12번째 희생양이 될 것으로 점쳤다. 예상대로 카라스키야는 2라운드에서만 4차례나 다운을 빼앗아냈다. 하지만 홍수환은 비틀거리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운명의 3라운드. KO승을 자신한 카라스키야가 주먹을 휘두르며 공격해 들어왔지만 홍수환은 송곳 같은 양 훅을 날린 뒤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상대 관자놀이에 꽂았다. 이어진 회심의 레프트 훅. 믿기지 않는 역전극이 벌어졌다. 한국 스포츠사에 길이 남을 ‘4전5기’ 신화 창조의 순간이었다.
카라스키야는 1981년 복싱 글러브를 벗은 뒤 정치인으로 변신해 시의원, 시장을 거쳐 파나마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친구이자 형제인 홍수환을 만나서 너무나 기쁘다”고 말했다. 한국 취재진으로부터 열 살 차이인 홍수환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적합하다는 얘기를 들은 뒤부터 그 호칭을 빠뜨리지 않았다. 홍수환은 1978년 8월 19일 서울에서 카라스키야와 격돌했던 황복수도 초대했다. 카라스키야는 “홍수환, 황복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의 주먹을 매만지며 “여전히 주먹이 딱딱하다”놀라자 카라스키야는 “나는 홍수환을 4번 넘어뜨렸는데 홍수환은 한 번 쳐서 이겼다”고 화답했다. 펀치력은 홍수환이 더 우위라는 의미였다.
덕담은 이어졌다. 홍수환은 “카라스키야는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비참하게 진 건데 절망하지 않고 링보다 더 무서운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말했다. 카라스키야 역시 “우리는 29년 전 링에서 격렬하게 싸웠지만 이제는 친구다”며 미소를 지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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