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순이를 위한 인권선언 ‘빠순이는…’
주류문학이 인정한 소설 ‘환상통’
자기성찰 담론의 시작 ‘잡지 빠순’
빠순이 역사 20년, 당당한 문화가 되다
“내가 사랑한 남자들은 언제나 육체적으론 가장 아름답고, 정신적으론 불안정한 시기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리석고, 맹목적이며,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했다. 취향이 없고, 말이 많으며, 언제나 노골적으로 애정을 갈구했다. 나는 그 눈멂을 무척 사랑했다.”
이희주 작가의 소설 ‘환상통’(문학동네)의 주인공은 ‘빠순이’다. 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좇아 다니는 두 여자 만옥과 m은 방송국에서 줄 서다 만나 친구가 된다. m의 서술, 만옥의 서술, 만옥을 사랑했던 남자의 서술이 차례로 이어지는 소설은 그 동안 ‘쓰잘데기 없는 짓’으로 치부되던 아이돌 사랑이 얼마나 복잡한 층위로 전개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받았다. 빠순이를 소재로 한 소설이 주류 문학출판사에서 주는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아이돌 산업이 부흥한 1990년대 후반 이래 빠순이는 한국의 대중문화, 청소년문화, 여성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됐지만, 이른바 제도권과는 거리가 먼 음지 중의 음지였다. 최근 연달아 나오는 빠순이 관련 책과 잡지는 ‘빠순이 20년 역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덮어놓고 손가락질하던 비빠순이들은 경제와 문화 전반에 끼치는 빠순이의 막대한 영향력을 재고하기 시작했고, 덮어놓고 ‘덕질’에만 매진하던 빠순이들은 개인의 내면과 집단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빠순이를 자처하는 딸 지원씨와 함께 최근 펴낸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인물과사상사)는 빠순이 예찬서다. 강 교수는 여기서 빠순이를 둘러싼 비하와 혐오의 정서에 여성 문제와 인권 문제가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들은 빠순이들이 돈을 내고 콘서트에 가면서도 경호원들에게 얻어 맞고 기성세대로부터 손가락질 당한다며, K팝 부흥의 주역인 빠순이들에게 전 사회적 배은망덕이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성 사회는 ‘상식’에 반한다고 간주되는 어떤 사회적 현상을 일탈로 규정함으로써 그 현상의 사회적 의미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우리는 그런 ‘상식의 폭력’을 역이용하면서 빠순이는 전 사회에 편재하며, 빠질은 전 사회적 현상임을 말하면서 빠순이들이 누려 마땅한 인권이 회복되어야 할 당위성을 역설하고자 한다.” ‘환상통’이 작가 개인의 경험을 소설화함으로써 일반화ㆍ타자화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는 여성과 청소년이라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기성세대 남성 학자가 찍은 ‘입국 도장’이다.
최근 창간한 ‘잡지 빠순’은 두 책이 메우지 못한 구멍, 즉 집단에 대한 내부 비판의 역할을 자처한다. 지난달 말 SNS를 통해 창간호 발행을 알린 ‘잡지 빠순’은 “10만가지 아이돌-빠순이 병크의 기록을 통한 자성적 빠순 담론의 시작”이라며 “빠순-윤리의 비판적 성찰부터 여성 혐오 콘텐츠와 폭력에 저항하는 빠순이 권리 운동의 기록” 를 다루겠다고 선언했다. ‘병크’란 ‘병신-크리티컬’의 준말로 팬덤 내에서 일어나는 비윤리적 행태, 아이돌의 연애를 허용하지 않는다든가 아이돌의 불법 행위까지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것을 뜻한다. 창간인은 소개 글에서 여성 혐오를 내재화한 ‘유교 빠순이’들이 남자 아이돌을 성적으로 소비하는 여성팬들을 꾸짖는 것을 비판하며, 이것이 현실의 견고한 성적 헤게모니를 유지시키는 꼴이라고 주장했다.
음지의 빠순이 문화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현상에 대해 이진송 계간홀로 편집장은 “(아이돌 팬덤을)메타적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사회적 근육이 생긴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산업이 커지고 팬들의 연령과 직업이 다양해지면서 팬 활동을 ‘10대 시절의 일탈’이 아닌 당당한 취미로 보는 시각이 내외부적으로 확산됐다”며 “아직은 비판과 성찰에 방어적이지만 지속가능한 ‘빠순질’을 위해선 문제를 공론화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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