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부, 경로당 6만3000곳 지정
이웃 주민의 적극 신고, 보호 구상
시행 1년여 불구 효과 거의 없어
“남 가정사$ 괜히 망신 줄까 걱정”
인식전환 급한데 홍보, 교육 없어
대한노인회에 운영 떠넘기고
강사 양성한다면서 이틀 교육뿐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A경로당에서는 할머니 10여명이 삼삼오오 모여 빨갛게 익은 말린 고추를 손질하고 있었다. 베란다에 앉아 기자를 반기는 이순희(79ㆍ여)씨에게 출입문 앞에 붙은 주황색 스티커에 대해 묻자 ‘그런 게 있었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A경로당은 지난해 초 학대 피해 노인을 보호하고 신고하는 ‘학대노인지킴이집’으로 지정된 곳이다. 주황색 스티커는 이를 알리는 표지이지만 경로당 회원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날 종로ㆍ동대문ㆍ노원구 등 서울 지역 학대노인지킴이집으로 지정된 경로당 12곳을 둘러본 결과 사정은 비슷했다.
학대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노인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정부가 도입한 학대노인지킴이집 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이 제도는 학대노인지킴이집 운영자(임원)가 노인학대를 인지할 경우 관련 기관에 신고해 도움을 청하고 회원들에게도 적극적인 신고를 교육하도록 했다.
학대피해 노인 상당수는 외부에 도움 요청을 꺼리고 있다. 가족을 신고한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노인학대 신고 3,818건 중 70%는 아들과 딸, 며느리 등 가족이 가해자였다. 보건복지부는 이처럼 저조한 노인학대 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해 전국 경로당 6만3,000여 곳을 학대노인지킴이집으로 선정했다. 동네 사정에 밝은 경로당을 활용해 지역 네트워크를 만들면 학대 노인을 조기 발견하고 적절한 대처가 가능할 것이라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시행 1년 반이 지난 현재 지킴이집 운영은 겉돌고 있는 실정이다. 지킴이집은 주변의 학대 사실을 알게 된 경로당 노인들이 직접 노인보호전문기관에 신고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문제는 감시 역할을 해야 할 노인들이 학대 사실을 외부로 드러내는 자체를 기피한다는 점이다. 동대문구 B경로당 회원 박모(76)씨는 “자식한테 학대당한 걸 떠벌리면 결국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라며 “설령 다른 가정의 학대 사실을 알아도 괜히 망신만 줄까 봐 쉬쉬하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노인전문기관 관계자도 “여전히 많은 어르신들이 학대를 피해자의 잘못으로 여겨 신원을 보장하는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노인들의 학대신고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지킴이집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으나 교육이나 홍보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현재 지킴이집 운영 교육은 복지부 위탁을 받아 전국 경로당을 관리하는 대한노인회가 담당하고 있다. 대한노인회 서울강북지회 관계자는 “교육 횟수가 정해지지 않은데다 예산도 부족해 학대예방교육을 실시한 적이 없다”고 했다. 종로구 C경로당 회장 강모(83)씨도 “지난해 경로당에 안내스티커를 붙이고 회원들에게 관련 책자를 나눠준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경로당 임원 교육 역시 대한노인회가 1년에 한두 차례 주관하는 행사에 강의 하나를 추가한 정도다.
상황이 이런데도 복지부는 대한노인회에 관리를 일임했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다. 대한노인회 관계자는 “학대노인지킴이집 안내판을 부착하라는 지시 외에 다른 지침은커녕 교육을 전담하는 노인학대 전문 강사도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 관계자는 “1년에 두 차례 실시하는 지킴이집 운영 평가에서 일부 미흡한 점이 드러나 올해부터 경로당 임원 중 희망자를 노인학대예방강사로 양성해 부족한 점을 보완할 계획”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교육이 단 이틀간 진행되는데다 실제 활동은 강사 개인의 자원봉사에 맡겨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황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노인에게 ‘노인보호’의 사회적 역할을 부여하는 게 정책의 핵심이지만 정부가 경로당을 비공식 조직으로 치부해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며 “민간단체에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 정부가 나서 교육을 강화해야 당사자인 노인들의 참여 의지도 높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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