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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장자 '사기행각'에 판 깔아준 방송

입력
2016.09.0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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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채널A '풍문으로 들었쇼'에 출연한 이희진. 방송화면 캡처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5월까지 채널A '풍문으로 들었쇼'에 출연한 이희진. 방송화면 캡처

‘청담동 주식부자’ 이희진(30)씨에 대해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과거 그가 출연했던 방송 프로그램도 덩달아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의 사기 행각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 하나같이 “종합편성채널(종편)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성공을 과시해 믿음이 갔다”고 하소연했기 때문입니다.

이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지난 5월까지 채널A 연예정보 프로그램 ‘풍문으로 들었쇼’에 고정 출연해 자신이 “성공한 청년 투자자”이며 “청담동 소재 고급빌라와 30억이 넘는 외제차를 구입했다”고 소개하며 노골적으로 재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아예 ‘청담동 백만장자’라는 이름표까지 달고 스튜디오에 나왔고 제작진은 그의 ‘럭셔리 하우스를 단독공개’한다며 한 눈에 봐도 호화스러운 집 내부와 외제차가 즐비한 주차장을 비추기도 했습니다. 이씨는 또 “ ‘돈자랑이 심하다’는 악플을 단 네티즌 수백 명을 고소하느라 8억원 정도 들었다” “잠깐 사귄 걸그룹 멤버 여자친구를 위해 (음반)제작 비용 전액을 선물로 지원했다” 등의 발언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당시 사회자는 “알고 보니 자수성가했더라.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며 그를 치켜세웠고 이씨도 나이트클럽 웨이터와 막노동 등을 전전한 사연을 밝히며 어느새 그는 ‘흙수저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씨는 이미 지난해 초부터 투자자들을 모아 허위 정보를 퍼뜨리고 미리 사둔 헐값의 장외주식을 비싸게 되팔아 수백억 원대 부당 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씨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수백억 원대 손해를 입은 피해자들이 그가 방송에 출연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방송이 이씨에게 범죄를 더 키울 수 있는 판을 깔아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보험, 펀드 다 해약하고 이희진이 추천한 종목에 투자하면 수익 난다”는 그의 단언에 속은 피해자들이 불어나는 동안에도 방송은 그의 재력과 입담을 더 그럴싸하게 포장해 보여주느라 여념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6월 Mnet '음악의 신2'에 출연한 이희진씨. 방송화면 캡처
지난 6월 Mnet '음악의 신2'에 출연한 이희진씨. 방송화면 캡처

이씨는 불과 석 달 전인 지난 6월에도 음악전문 케이블 방송 Mnet ‘음악의 신2’에 출연해 수영장이 딸린 자신의 집을 공개했습니다. 이상민 등 출연자들이 이씨를 향해 “슈퍼 리치!”라고 부르는 등 재력 과시는 이 프로그램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씨의 사기행각이 보도된 뒤 해당 프로그램 관계자들은 당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채널A 관계자는 7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이씨가) 청담동에 거주하며 연예인들을 많이 알고 있다는 말에 프로그램 성격과 맞는다고 생각해 섭외했다”며 “사전 미팅부터 마지막 출연 날까지도 (범죄 혐의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밝혔습니다. Mnet 관계자는 “이미 종영한 프로그램이고 (이씨가) 딱 한 번 특별 출연해 답하기 조심스럽다”면서 “이씨가 먼저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와 출연이 성사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작진이 이씨의 범죄 혐의를 알고도 그를 섭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출연자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도 하지 않은 방송사의 책임은 가볍지 않아 보입니다. 방송에서 밝힌 이씨의 모든 배경은 사실 이씨의 입을 통해서 나왔을 뿐 그 전후 사정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청자들이 가볍게 보는 예능 프로그램 출연자라 해도 대중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제작진만 몰랐다니,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씨의 방송 출연에 대해 한 종합편성채널 관계자는 이런 의견을 내놨습니다. “대중들이 럭셔리한 셀럽(셀러브리티, 즉 유명인사라는 뜻)들 좋아하잖아요.” 참 편리하고 무책임한 변명입니다. 아무리 방송사 눈에 시청자들은 시청률 올려 광고비 벌어주는 존재로 보인다지만, 콘텐츠 제작자로서 최소한의 책임감과 윤리의식은 가져야 하지 않을 까요.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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