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상한 얼굴과 가녀린 체구. 누가 봐도 여자인데 남자주인공만 몰라 본다. 자꾸 끌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홀로 번뇌하면서 때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사랑인 것을. 남남(男男) 로맨스도 불사하는 수밖에. 그러다 그 남자가 남장을 한 여자였다는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최고조에 이른 갈등이 순식간에 해결되며 로맨스가 완성된다. 남장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의 클리셰다.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이 출생의 비밀만큼이나 진부하고 상투적이라 여겨졌던 남장여자 캐릭터를 등장시켜 화제몰이를 하고 있다. 시청률 20% 진입도 초읽기 수순이다.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악연으로 얽힌 두 주인공이 궁궐에서 왕세자와 내관으로 재회해 우정을 나누다 점점 마음이 깊어지는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넉살 좋고 씩씩한 주인공 홍라온을 연기하는 김유정에 대한 호평도 쏟아진다.
남장여자는 여전히 불패의 흥행 코드다. MBC ‘커피프린스 1호점’(2007)부터 SBS ‘미남이시네요’(2009)와 KBS2 ‘성균관 스캔들’(2010)까지. 최근 방영된 남장여자 드라마들은 어김없이 흥행했다. 남장여자를 잘 소화해낸 윤은혜와 박신혜, 박민영은 연기력을 재평가 받으며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했다. 이번엔 김유정 차례가 된 듯하다. 안방 시청자들을 홀린 남장여자 캐릭터의 계보를 살펴봤다.
생활형 : ‘커피프린스 1호점’ 윤은혜
남자만 직원으로 채용하는 커피숍 커피프린스에 위장 취업한 고은찬(윤은혜)이 주인공. 일부러 남자 행세를 한 건 아닌데 짧은 머리에 털털한 옷차림, 걸걸한 말투까지 남자 같은 겉모습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남자로 오해 받았다.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일자리를 잃을까 겁나 나중엔 일부러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커피프린스의 사장인 최한결(공유)은 그런 고은찬에게 마음이 쓰인다. 괜한 시비를 걸기도 한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네가 남자든 외계인이든 갈 데까지 가보자”고 고백한다. 지금도 드라마팬들 사이에 회자되는 명대사다. 이 드라마는 방영 당시 최고시청률 27.8%(닐슨코리아)를 찍으며 크게 인기를 끌었다.
윤은혜는 화장기 없는 민낯에 수더분한 차림새로 캐릭터를 매끄럽게 소화해냈다. 방영 1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도 윤은혜의 ‘인생작’으로 꼽힌다. ‘먹방 여신’ 고은찬이 직원 회식 자리에서 덜 익은 삼겹살을 자르지도 않고 돌돌 말아 우악스럽게 먹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전형적인 캔디형 캐릭터지만 윤은혜의 생활 연기 덕에 예쁘지 않아서 더 예쁜 여주인공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만화형 : ‘미남이시네요’ 박신혜
이란성 쌍둥이 오빠를 대신해 아이돌 밴드에 위장 잠입한 예비수녀 고미녀(박신혜)가 주인공. 그의 정체를 모르는 밴드 멤버들 사이에선 오빠 이름인 고미남으로 불린다. 밴드에 들어오기 전에 수녀원에서 생활했던 터라 세상 물정을 잘 몰라 살짝 민폐를 끼칠 때도 있지만 그리 얄밉지는 않다. 군대에서 쓰는 다나까체를 사용해 남자인 척하려는 모습이 귀엽게 보인다. 까칠한 리더 황태경(장근석)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고미남의 고민이 깊어진다. 고미남이 여자인 걸 진작에 눈치챈 밴드 멤버 강신우(정용화)는 고미남의 곁을 지키며 그를 위로한다. 남장여자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키다리아저씨 캐릭터다. 주요 인물 모두가 만화 캐릭터 같았던 이 드라마는 중국과 대만, 일본 등 아시아 전역에서 화제를 모았다.
이 드라마에서 박신혜는 아이돌 이미지를 십분 활용한 영리한 연기를 펼쳤다. 음악적 재능도 요긴하게 쓰였다. 연예계가 배경이라 톡톡 튀는 캐릭터들이 많았음에도 중심을 잘 잡은 연기로 드라마를 이끌었다. 박신혜가 아역 이미지를 벗고 배우로 성장하는 데 디딤돌이 된 드라마다. 고미남 역할로 크게 사랑 받은 박신혜는 해외 팬미팅을 매진시키는 거의 유일한 여배우가 됐다.
성장형 : ‘성균관 스캔들’ 박민영
넘치는 학구열로 성균관에 위장 입학한 김윤희(박민영)가 주인공. 병약한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돈을 받고 대리로 과거시험을 치르다 유생 이선준(박유천)에게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동생 이름 김윤식으로 성균관에 들어오게 된다. 김윤식은 학문을 익히고 동급생들과 어울리면서 여자로선 꿈도 꾸지 못할 넓은 세상을 가슴에 품게 된다. 이선준도 김윤식과 교분을 나누며 자신을 가둬온 원칙주의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해간다. 김윤식의 정체를 알면서도 감춰준 문재신(유아인)과 구용하(송중기)까지 더해 ‘잘금 4인방’이라 불린 성균관 4총사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가며 그릇된 권력에 맞서는 청년들의 시대정신까지 보여줬다. 로맨스사극에선 쉽게 보기 힘든 주제의식이다. 남자 주인공 누구와도 잘 어울렸던 박민영은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며 제 몫을 해냈다.
현대극에서 남장여자는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그려지지만, 사극 안에선 좀 더 풍부한 함의를 지닌다. 남장여자란 곧 유교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지위를 전복시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 캐릭터가 한층 주체적이다. 남장을 한 채 현실의 제약을 극복해가는 인물의 성장기와 시대가 불허한 남남 로맨스가 보조를 맞추기 때문에 극성이 한층 강해진다. ‘성균관 스캔들’이 바로 모범 사례다.
미스터리형 : ‘구르미 그린 달빛’ 김유정
빚쟁이들에게 쫓기다 얼떨결에 내관이 되어 위장 입궐한 홍라온이 주인공. 운종가를 누빌 땐, ‘잘 나서 난놈, 장차 크게 될 거라고 될놈, 돈 되는 일은 뭐든 한다고 할놈’, 그래서 ‘삼놈이’라 불렸다. 삼놈이는 어찌 된 영문인지 어릴 때부터 부모가 사내로 키웠다. 여기에 범상치 않은 사연이 숨겨져 있음을 암시해 삼놈이의 남장여자 미스터리를 강화했다. 언제 여자란 사실이 들통나느냐보다 그 사연이 더 궁금하게 만드는 전략이 아주 영리하다.
삼놈이의 정체를 더 궁금하게 만드는 건 17세 배우 김유정의 연기다. 능청스러운 코미디 연기부터 묵직한 감성 연기까지 노련하게 오가며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워낙 연기 잘하기로 소문 났지만 그래도 이렇게 잘할 줄 몰랐다는 게 시청자들의 평가다. MBC ‘해를 품은 달’에서도 탁월했던 멜로 감성이 한층 풍부해졌다. “내 사람이다” “너를 보면 화가 난다. 하지만 네가 보이지 않으면 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 등 매회 명대사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는 왕세자 이영(박보검)이 빛날 수 있는 것도 그 감성을 잘 받아서 되돌려주는 김유정의 연기 덕이 크다. 한 방송 관계자는 “김유정이 10대 연기자에 대한 인식을 바꿔가고 있다”며 “이 드라마를 마친 뒤 얼마나 더 성장한 배우가 돼 있을지 기대된다”고 평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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