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사학교’라는 곳이 있다. 퇴사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교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일이 지긋지긋한 회사원이라면 솔깃하겠지만 신속하고 깔끔하게 잘 퇴사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은 아니다. 퇴사를 고민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직장인을 부추기는 곳도 아니다. 대신 퇴사를 하고도 잘 살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돕는다. 그러니 ‘묻지마 퇴사’를 꿈꾼다면 여기서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퇴사하지 마세요.”
올 5월 설립된 퇴사학교는 삼성전자를 다니다 4년 만에 퇴사한 장수한(31)씨가 만든 직장인을 위한 대안학교다. 학교라곤 하지만 아직 건물도 없고 전용 강의실도 없다. 대신 학생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도 수업이 열릴 수 있다. 그래도 30여개 과목을 갖췄고 학생은 총 600여명이나 된다. 학칙은 ‘회사에 절대 소문내지 않기’ ‘입학은 조용히, 졸업은 화려하게 하기’ 등이고 과목으론 ‘퇴사학개론’ ‘회사 다니며 6주 창업준비’ ‘맥주덕후! 사업가 되다’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 ‘퇴사 후 자전거 세계여행’ 등이 있다.
퇴사학교의 실질적인 첫 학생은 장 대표다. 누구나 인정하는 좋은 회사에 다니다 스스로 사표를 내고 나왔을 때 그 역시 막막했다. “누구나 인정하고 저도 자부심을 느끼는 회사였지만 그걸로는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습니다. 10대와 20대 내내 주입식으로 공부하고 스펙만 쌓으며 살아오다 보니 막상 30대가 되자 답답했어요. 내가 원하는 게 무언지 찾고 싶었죠.”
퇴사 후 글을 쓰고 싶어서 ‘초일류 사원, 삼성을 떠나다’를 펴냈고 창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직장인을 위한 교육사업을 논의하다 퇴사학교를 차리게 됐다. 회사에 저당 잡힌 채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면서 언제 닥쳐올지 모를 퇴사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을 개선해볼 수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만든 학교다. “할 줄 아는 게 많지 않으니 창업준비가 어렵더군요. 지난 20년간 받은 교육이 대기업 취업 말고는 쓸모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어요. 창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어봤기에 퇴사학교에선 쓸모 있는 교육을 하려고 합니다.”
경영 컨설턴트를 하다 수제 맥주 사업을 하는 김태경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대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된 이혜린 그로잉맘 이사, 직장을 다니다 고려대 MBA로 진학한 스타트업 업체 네오펙트의 최안나 PR 매니저, 회사를 그만두고 책을 마시며 술을 마시는 바 ‘책바’를 연 정인성 대표 등이 자신의 퇴사 및 창업 경험담을 퇴사 지망생들과 나눈다. 장 대표는 “대기업 창업주처럼 거창한 위인이 아니라 지금 바로 참고하고 따라 하기 좋은 1, 2년 인생 선배 같은 현실적인 롤모델을 선생님으로 모시려 한다”고 했다.
퇴사학교 학생은 직장인 초년생인 20대부터 정년퇴직을 앞둔 50대 후반까지 다양하다. 퇴사하고자 하는 이유도 시기도 제각각이지만 피고용인인 이상 언젠가는 퇴사를 해야 한다는 것만은 누구나 같다. “회사를 잘 다니는 게 가장 중요하겠죠. 직장에서 잘 배우고, 배운 것을 활용해 자신의 꿈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뤄볼 예정입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모두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분들이고 인생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 단계에 있는 분들이라 저도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됩니다. 실은 제 꿈도 퇴사학교를 퇴사하는 거예요. 여기 학생들처럼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찾아 나서야죠.”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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