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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는 누군가를 위한 여유와 위로의 공간

입력
2016.09.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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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바다의 낭만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한밤 포구에서의 낚시.
제주 바다의 낭만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한밤 포구에서의 낚시.

출퇴근의 피로가 몸 속 구석구석에서 농도를 점점 더하고 있던 나날이었다. 피로의 농도는 그대로 체중이 되는 듯,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었다. 모든 버거움의 원인 중 하나는 비 한방울 없이 지속되는 무더위였다. 잠깐이라도 에어컨 바람 없이는 잠들 수 없고, 아침에 일어나면 땀으로 푹 젖은 베개의 찝찝함을 느껴야만 했던 열대야의 나날 때문이었다.

퇴근 시간이 임박한 어느 날 저녁, 서쪽 작은 마을에 사시는 형님이 전화를 주셨다. ‘낮에 잡아 둔 각재기가 있으니 각재기국에 소주 한 잔 하러 와. 한치채비도 챙기고!’ 버거움은 그대로 귀찮음이 되어 ‘언제 한 번 한치 낚으러 가나’ 고민만 하고 있었던 차이기도 했었다. 형님의 전화는 그래서 이 참에 한치대나 휘둘러보자 싶은 좋은 기회가 되어 준 것이었다. 퇴근해서 한낮의 매서운 직사광선에 찜통이 되어버린 집을 뒤로하고 채비를 챙겨 바다로 향했다. 덥고 습하며 한낮의 열기가 디디는 땅 곳곳에서 매섭게 오르는 저녁이지만, 바닷가는 그나마 바람이 불고 좀 시원해서 있을 만 하니, 저녁에 집을 나서는 일은 흡사 탈출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밤이 깃든 제주 바다. 수평선엔 낚싯배들의 어화가 불을 밝힌다.
밤이 깃든 제주 바다. 수평선엔 낚싯배들의 어화가 불을 밝힌다.

포구에 도착하니 바다는 어둠의 시작점에 있었다. 한낮의 참돔낚시에서 한치낚시로 채비를 이제 막 바꾼 형님에게 인사를 하고 나도 잠시 한치대를 휘둘러본다. 바다엔 잔물결이 일고 옆으로는 한치대에 연결된 붉고 푸른 찌들이 바다 위에서 일렁인다. 올해 첫 포구에서의 한치낚시다. 옆에서는 한 두어 마리 간간히 올라오는데 내 채비에는 소식이 없었다. 주먹만한 문어 한 마리 건져 올린 뒤에 다른 일행들이 도착하여 대를 접었다.

작은 동네포구에 너댓의 사람이 모였다. 어둔 밤 포구는 그리 어둡지 않다. 저 멀리 작게 터질듯 수평선에 나란히 선 갈칫배 불빛은 나직히 지나가는 구름에 반사되고 습한 공기에 산란하여 사위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덥고 습하기는 산쪽이나 마찬가지이지만 가끔 불어주는 바람이 시원함을 조금 느끼게 해 준다. 멀지 않은 거리에 갈칫배 불빛을 배경으로 선 비양도의 밤 자태는 눈을 심심치 않게 한다. 형님은 동네사람이 건네 준 한치를 손질하여 초장과 함께 내어주고 낮에 잡아둔 각재기를 손질한다. 각재기는 전갱이의 제주사투리이다. 손질한 각재기를 냄비에 넣어 물을 붓고 마늘과 매운고추, 소금으로 간하여 끓인다. 이런저런 채소가 있으면 더 좋겠지만, 포구 바닥에 주저앉아 잠깐의 여름밤을 즐기는데 굳이 준비가 치밀할 필요는 없다. 갓 잡은 것의 정수와 그것을 충분히 받쳐주는 몇 가지 핵심만 있다면, 여름 밤의 맛은 만족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밤의 각재기국은 뿌옇고 맑은 기름이 살짝 떠서, 담백함과 칼칼함에 목과 뱃속이 시원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옆으로 나직이 흐르던 구름은 굵은 빗방울 몇 개를 후두둑 뿌리고 지나갔다.

포구의 정경은 섬과 바다와 낚시하는 사람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변정리와 적당함에의 인식만 있다면, 자리하나 펴 놓고 버거움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의 풍경, 그리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느끼는 가벼운 마음. 즐김에 밤낮이 차이 없고 거기에 입이 잠시 즐거울 수 있으면 더욱 좋다. 형님의 호출은 그래서 반갑고 고맙다. 봄에는 자리돔, 여름 시작 무렵엔 독가시치와 쥐치 벵에돔, 그리고 한치와 각재기. 지금은 한여름이 지났고 충분한 비도 내렸다. 가을의 시작인 것이다. 조금의 한기가 느껴지기 전까진 포구는 누군가의 여유와 위로의 공간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바다도 점점 풍성해질 것이다. 몸과 마음이 더욱 위로 받고 살찌워질 때인 것이다. 내가 나서든지, 아니면 형님의 전화를 좀 더 깊은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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