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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비극이어라, 결혼은 환멸이어라

입력
2016.09.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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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21년 만의 장편소설

연애-결혼에 대한 철학적 탐구

왕자-공주 행복하게 살았다는 식

낭만주의 빠진 연애상 깨부 숴

뜨거운 연애 뒤 전쟁 같은 육아

지속가능한 사랑을 위한 바이블

알랭 드 보통의 새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사랑이 감정이 아닌 기술임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은행나무 제공
알랭 드 보통의 새 소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사랑이 감정이 아닌 기술임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은행나무 제공

문예사조로서의 낭만주의는 에밀 졸라의 자연주의가 대두하면서 자연스럽게 종식됐다. 그러나 연애사조로서의 낭만주의는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막강하다. 알랭 드 보통은 후자의 이 낭만주의를 척결하고자 한다. 인간을 자연(환경)의 결과로 본 에밀 졸라처럼, 드 보통은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의 유구한 기만적 서사를 심리과학자의 냉정한 시선으로 깨부순다.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21년 만에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소설과 에세이, 서사와 철학 사이에 스타일의 편차가 매우 적은 바, 21년에 감격할 만큼의 새로움은 없다. 다만 작가가 결혼과 육아라는 오랜 삶의 경험을 축적했다. 사랑과 이별에 한정됐던 소설의 시공간이 결혼과 출산과 육아와 부부 갈등과 외도와 혼인 파탄의 위기로까지 확장되며 공감의 영역대를 넓힌다. 원제 ‘사랑의 과정(The Course of Love)’을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김한영 옮김, 은행나무)으로 바꿔 달고 나온 책은 그 자체 이미 브랜드가 된 작가답게 출간 1주일 만에 5만부가 팔려나가며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종합순위(교보문고) 3위에 올랐다.

결말을 미리 알고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생활이 된 사랑은 어떻게 지속되는가’라는 책 띠지의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지속되지 않는다. 각별하고도 처절한 노력이 없다면.’ 영혼의 짝을 한눈에 알아보고 뜨거운 연애 감정에 불타 오른 두 남녀, 라비와 커스틴은 낭만주의의 세례를 받고 자란 사람들답게 저절로 지속되는 낭만적 사랑의 감정을 기대한다. 하지만 사소한 갈등과 숨막히도록 부대끼는 존재감, 출산과 육아가 으레 촉발하는 육체적·정신적 소진,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배우자에게는 떨칠 수 없는 ‘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쳤다’는 원망, 아내(때로는 남편)만 아니면 누구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성적·정서적 취약성…. 끝내 외도를 저지르고 파탄지경에 이르러 부부관계 전문가를 찾아가 상담을 받기까지, 기실 소설 속 서사란 82쿡(주부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즐비한 하소연들과 다를 게 없다.

명조체의 건조한, 그래서 서글픈 서사 사이에 해설자의 고딕체 논평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드 보통식 소설 작법은 연애와 결혼이라는 제도의 철학적 탐구를 위해 이야기를 예시로 활용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노출한다. 통찰은 이 논평에서 번득인다. 모든 연애서사는 ‘A는 B를 좋아하는데, 알고 보니 B도 A를 좋아하더라’의 확인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그 비극이 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달리, 사랑은 그 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것은 더 이상 낭만적이거나 열정적이기만 하지 않다. 드 보통이 반복해 지적하는 바,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건 단지 사랑의 시작이다.”

작가는 모든 사랑의 원형으로 유아기에 받은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제시한다. 인간의 일생이란 부모로부터 무한의 희생적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의 등가물을 찾아 연애를 하지만, 연인은 부모가 아니므로 그러한 사랑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비극적 환멸로 점철된다. 육아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식을 키운다는 것의 황홀함과 유의미함을 강조하는 소설은 육아의 고충이 부부애의 파탄으로 전이되는 지점을 적시한다. “(아이를 향한)사랑을 위한 노력이 그들을 녹초로 만든다. 그들에겐 서로에게 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피곤한 아이는 오랫동안 방치된 것에 화가 치밀고 조각나 있다.”

“안정과 모험을 동시에 추구”하는 근본적 모순을 낭만주의 결혼은 내장하고 있으므로, “결혼 생활에 머무른 것은 기이하고도 신기한 업적”이다. 사랑이 감정이 아니라 기술임을 이제는 대부분 알고 있지만, 안다고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와의 “전투로 단련된 상흔 입은 사랑”을 어떻게 지속가능한 것으로 바꿀 수 있을지, 아이를 키우는 부부라면 바이블처럼 읽게 될 소설이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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