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기술 주도권 산업계로 이관
R&D 예산 감소ㆍ관료주의 탓에
신무기 프로젝트 구애 헛물 일쑤
구글 등 “접촉ㆍ협력 말라” 박대
美 국방부 실추 위상 회복 안간힘
“방명록에는 이름을 남기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손님 숨기기’ 싸움이 한창이다. 끊임없이 선물 상자를 들고 찾는 손님과 달갑지만은 않은 이들의 흔적을 지우려는 집주인 간의 기싸움이다. 주인공은 미국 국방부 국가보안기술 담당자 애덤 제이 해리슨과 실리콘밸리 기업들. 군사기술 개발 협력을 위해 실리콘밸리를 찾는 국방부 관리들이 자신과 접촉을 외부에 드러내길 꺼려하는 기업들로부터 잇따라 문전박대를 당하고 있는 현주소다.
전세계 국방비 1위(약 663조원)에다 전쟁 수행 능력 1위를 자랑하는 미 국방부가 어쩌다 불청객 신세로 전락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최첨단 군사장비 및 기술 개발의 주도권이 미국 국방부에서 실리콘밸리를 필두로 한 산업계로 넘어가면서 생긴 현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를 인식한 국방부는 산업계에 다양한 프로젝트를 제안, 구애 중이지만 줄어든 연구ㆍ개발(R&D) 예산, 구식 관료주의로 인해 외면 받고 있다고 5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보도했다.
실리콘밸리의 ‘국방부 보이콧’ 신호는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이 최근 일본 도요타와 매각 협상 중인 로봇 기업 미국 보스턴다이내믹스와 일본계 샤프트(SCHAFT) 사례가 대표적이다. 구글은 2013년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주최 로봇기술 대회에서 우승한 두 기업을 인수하면서 제1조건으로 국방부와 접촉 금지를 내걸었다. 실제 샤프트는 지난해 DARPA 주최 경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리슨 국방부 관리자는 “구글은 국방부와 협력하길 원치 않는다”며 “우린 더 이상 미래에 투자하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국방부의 R&D 투자 예산이 기업에 쏟아지는 투자 자금에 비해 볼품없이 줄어드는 상황은 주도권 역전의 주 요인으로 꼽힌다. FT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군사 연구개발비는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전세계 연구 자금 중 절반을 차지했으나 최근 그 비중은 10%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애슈턴 카터 국방장관은 지난 4월 미국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미 국방부의 R&D 예산은 720억달러(약79조5,000억원) 정도로 애플, 인텔, 구글의 연구비를 합친 것 2배 이상”이라고 공언했으나, 실제 투자 금액은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125억달러(약13조8,000억원)인 것으로 밝혀졌다.
국방부가 외면 받는 또다른 이유는 구태를 답습하는 정부의 관료주의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소재 칩 제조업체 룩스 캐피털의 조쉬 울프 창립자는 “국방부와 작업은 요식으로 가득한 골칫거리”라며 “실리콘밸리의 젊은 혁신가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체제에 익숙해 정부의 관료주의에 질색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스티브 블랭크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대부분의 혁신적인 스타트업은 부가적인 (정부의) 서류작업을 감당하면서까지 그들의 지적 자원을 노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국방부는 대외 이미지 실추를 막기 위해 위기 상황을 애써 부인하면서도 자구책을 찾고 있다. 카터 국방장관은 지난 3월 에릭 슈미트 알파벳 회장 겸 전 구글 최고경영자를 대표로 한 방위혁신자문위원회(DIVA)를 발족, 일선 기술자들과 협력해 국방부 보안 시스템의 취약점을 찾기 위한 ‘펜타곤을 해킹하라’(Hack the Pentagon)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그는 6월 국방기술 관련 회담에서도 “국가 보안을 위해 국방부와 실리콘밸리 기업가들 간 다리를 다시 짓는 작업에 헌신하겠다”며 구애를 이어갔다.
김정원기자 garden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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