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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추미애, 추다르크, 돼지엄마, 그 다음은?

입력
2016.09.0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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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미애 의원이 지난달 28일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에 당선됐다. 그는 과거 열린우리당 분당,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찬성 등으로 친노 진영에 공격을 받았다. 이후 삼보일배로 공개 사과했지만 친 노무현 진영의 반감을 쉽게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그의 당선은 친노, 노무현 전 대통령과 궤를 같이 하는 친 문재인 진영의 압도적 지지 덕분이었다. 그의 어떤 점이 불편했던 친노 진영까지 돌아서게 만들었는지 짚어 봤다.

추미애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를 시작했다. 사진은 2006년 추 대표가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해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추미애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를 시작했다. 사진은 2006년 추 대표가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방해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추 대표는 1958년 10월 대구에서 세탁소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한양대 법학과를 나온 그는 1982년 사법시험 통과 후 춘천지방법원 등에서 판사로 일했다. 판사 시절 그는 1986년 1,500여 명이 참가한 건국대 점거 농성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신청한 책 100여권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해 소신 있는 판사로 알려졌다. 당시 그는 “양심에 따른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후 추 대표는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고 제 15, 16대 국회의원에 내리 당선돼 직설적이며 매서운 의정 활동을 펼쳐 주목을 받았다. 그가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원서를 쓴 날이 1995년 8월 27일로, 더민주당 대표에 당선된 날짜와 같다. 평당원으로 입당해 21년 만에 대표직에 오른 것이다.

추 대표는 대통령 선거 관련 활동 때문에 몇 가지 별명을 얻었다. 그는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 당시 이른바 ‘잔다르크 유세단’을 이끌며 대구에서 지역감정에 맞서 선거 운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때 보여준 강한 돌파력 때문에 ‘추다르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2년 대선 때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선대위 ‘국민참여운동본부’를 이끌며 ‘희망돼지 저금통’을 들고 선거운동자금을 모아 ‘돼지엄마’라는 별칭을 얻었다. (☞ 관련기사 )

2002년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열린 민주당 정당연설회에서 추미애(오른쪽) 당시 민주당 의원이 노무현 대선 후보(가운데), 정동영 의원과 함께 손을 잡고 청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2년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열린 민주당 정당연설회에서 추미애(오른쪽) 당시 민주당 의원이 노무현 대선 후보(가운데), 정동영 의원과 함께 손을 잡고 청중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하지만 추 대표는 노 전 대통령 당선에 크게 기여하고도 1년 만에 노 전 대통령과 갈라서며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이유는 2003년 노 전 대통령이 DJ 정부의 대북송금사건에 대한 특검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노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DJ를 배신했다며 강하게 비판했고 2004년 노 전 대통령 탄핵 찬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추 대표는 찬성표를 던지기 전까지 노 전 대통령 탄핵 추진을 막으려고 했다. 2004년 3월 조순형 새천년민주당 대표가 노 전 대통령의 총선 개입 발언을 문제 삼아 탄핵을 추진하자 당시 최고위원이던 추 대표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너 혼자 잘났냐”는 비난을 쏟아냈다. 결국 그는 당론으로 정해진 일을 거역하지 못하고 탄핵에 찬성표를 냈다. 그는 “감옥 간 분들 표까지 긁어 모아 탄핵을 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며 “숯댕이(범죄자)가 검댕이(노무현)를 나무랄 수 없으니 민주당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내가 기꺼이 (찬성) 표를 드리겠다”고 밝혔다. (☞관련기사)

2004년 추미애 당시 선대위원장이 민주당을 지키자는 취지의 삼보일배를 하고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4년 추미애 당시 선대위원장이 민주당을 지키자는 취지의 삼보일배를 하고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노 전 대통령 탄핵이 부결되면서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결국 속죄의 의미로 ‘3보1배’를 하며 옛 민주당 구하기에 나섰다. 그렇지만 그는 제 17대 총선에서 낙선하며 탄핵사건의 여파를 혹독하게 겪었고 2년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노 전 대통령은 추 대표에게 두 차례 입각을 제의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추 대표의 두 번째 정치적 위기는 2009년에 찾아왔다. 그는 제 18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 시절 한나라당 의원들과 단독으로 ‘노동조합 및 노조관계 조정법 개정안’(추미애 안)을 직권상정 후 통과시켰다. 민주당과 민주노총 등 야권은 산별노조의 교섭권을 보장하지 않은 노동개악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야권은 ‘여당과 날치기했다’며 환노위 위원장인 추 대표를 비판하고 2개월 당원 자격 정지라는 징계를 내렸다.

1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추미애 대표가 우상호 원내대표와 추경합의에 대해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1일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추미애 대표가 우상호 원내대표와 추경합의에 대해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오대근기자 inliner@hankookilbo.com

그렇게 친노 진영과 멀어졌던 추 대표는 2012년 제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캠프의 국민통합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으며 관계를 어느 정도 회복했다.그는 지난해 2·8 전당대회에서도 문 전 대표를 위해 뛰면서 친문계로 분류됐다. 이에 문 전 대표도 추 대표를 지명직 최고위원에 선출하며 화답했다.

추 대표는 이번 당선을 통해 고 박순천 민중당 총재, 한명숙 전 총리(2012년 민주통합당 대표)에 이어 세 번째로 야권의 여성 대표가 됐다. 또 대구경북(TK) 출신 첫 여성 야권 대표로 이름을 남겼다.

정치권에서는 추 대표의 고난과 승리가 모두 소신 정치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때로는 욕을 먹을 지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며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이제 그의 과제는 주변의 우려처럼 ‘친문’ ‘주류’ 중심의 정치에서 벗어나 회고록 제목처럼 ‘물러서지 않는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그의 어깨에는 내년 대선에서 더민주의 집권을 견인해야 할 막중한 책무가 걸려 있다. 이를 위해 당내 대선 주자들이 경쟁할 공정한 룰을 만들어 신뢰할 만한 후보가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다.

강희경기자 kst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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