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란 어떤 걸까?
하마다 게이코 글, 그림ㆍ박종진 옮김,
사계절출판사ㆍ50쪽ㆍ1만800원
누구나 평화를 바란다. 지금 이 신문만 훑어봐도 알 수 있듯이, 세상이 평화롭지 않으므로.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평화’란 어떤 걸까? 사전은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표준국어대사전’)라 정의한다. 맞지만 공허하다. 평화란 어떤 상태일 뿐만 아니라 이상이요 목표일 텐데, 그것을 향해 갈 구체적인 실천의 지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문제를 생각해 보는 그림책이다.
이 책의 화자는 아이다. 그래서 이 책의 말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폭격기가 날아오고 폭탄이 떨어져 일상이 부서진 전쟁터에서, 엄마 품에 매달린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평화란 “전쟁을 하지 않는 것”, “폭탄 따위는 떨어뜨리지 않는 것”, “집과 마을을 파괴하지 않는 것.” 그 까닭도 명료하다. “왜냐면, 사랑하는 사람과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 싶으니까.” 그보다 더 또렷하고 절실한 이유가 또 있을까?
아이의 평화는 이렇게 이어진다. “배가 고프면 누구든 밥을 먹을 수 있고, 친구들과 함께 공부도 할 수 있는 것”, “사람들 앞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맘껏 부를 수 있는 것”, “싫은 건 싫다고 혼자서라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 타인의 시선을 얻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지극히 당연한 권리이자 일상이지만, 세상의 수많은 ‘누군가’들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절실한 바람인 것이 엄연한 현실이니까. 나만 평화롭다고 평화로운 게 아니니까.
아이는 이제 ‘관계’ 속에 선다. “잘못을 저질렀다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 “어떤 신을 믿더라도, 신을 믿지 않더라도, 서로서로 화를 내지 않는 것.” 누구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누구나 다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을 부정할 때, 자신의 잘못과 남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평화는 요원해진다. 그러므로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반성과 존중은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한 전제다. 사실 이러한 인식은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이 ‘한중일 작가들의 공동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각별하게 느껴진다.
잘못의 인정과 사과는 평화를 위해 필요한 ‘과거에 대한 태도’이고, 다름에 대한 관용과 존중은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자세’다. 그 반성과 존중으로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어우러진 ‘우리’가 평화를 이루어간다. 어우러져 마음껏 뛰어 놀고, 아침까지 푹 잠을 잔다. 그리고 입을 모아 외친다. “목숨은 한 사람에 하나씩, 오직 하나뿐인 귀중한 목숨”이니, “절대 죽여서는 안 돼. 죽임을 당해서도 안 돼. 무기 따위는 필요 없어.” 싸우는 대신 “모두 함께 잔치를 준비하자.”
그리하여 기다리고 기다리던 평화로운 날에 다 같이 신나게 행진을 한다. 그제야 아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네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책 속의 아이는 책 밖 어른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요청하는 것처럼.
한일 정부는 이른바 ‘위안부 합의’에 따라 ‘법적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께 지급하겠다고 한다.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하니 마니 오가는 말들은 종잡을 수 없이 혼탁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졸렬하고 사악한 처사다. 아이들이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말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김장성 그림책작가ㆍ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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