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사극 출연은 안 하겠다던 배우 차승원(46)이 다시 갓끈을 동여맸다. MBC 드라마 ‘화정’(2015)에서 광해의 폐위를 끝으로 퇴장한 직후였다. 새롭게 그를 찾아온 인물은 대동여지도를 만든 조선 말기 지리학자 김정호. 지도에 미친 한 남자의 일생이 그를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마라도부터 백두산까지 9개월간의 국토대장정이 시작됐다. 혹한에 꽁꽁 얼어붙은 북한강을 짚신 한 켤레로 건넜고, 봄을 기다려 합천 황매산의 철쭉을 담아왔다. 하늘이 허락한 이에게만 보여준다는 백두산 천지의 황홀경은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한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차승원에게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물으니 그는 “직접 가면 몸이 고생하니 영화로 보는 게 어떻겠냐”고 답하고는 껄껄 웃었다.
7일 개봉하는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 차승원과 강우석 감독은 마치 지도에 산맥과 물줄기와 평야를 새겨 넣듯, 한 인간의 순수한 열정과 위대한 집념을 공들여 복원했다. 차승원은 “배우 생활을 하며 이런 작품을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범한 인물을 평범하게 그려낸 이유
김정호 신화가 일제강점기 식민사관에 의해 꾸며진 것이라는 연구가 나오고 대동여지도 또한 기존 지도들의 집대성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역사적 해석을 떠나 차승원이 바라본 김정호는 한마디로 “미친 사람”이었다. “대동여지도 목판을 보세요. 보통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지도에 몰두하느라 삶의 균형이 무너져서 기본적인 생활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에 담긴 김정호는 평범한 아버지이자 조금 유난스러운 지도쟁이일 뿐이다. 차승원의 인간미가 포개져 더욱 친근한 인물로 그려졌다. 차승원은 김정호의 위대한 업적보다 인간적 고뇌에 집중했다. “감정이 이해돼야 연기할 때 확신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비웠다. “촬영장에 도착하면 그곳 분위기가 저를 순식간에 바꿔놓더군요. 김정호의 말투와 표정,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어요. 애드리브가 필요 없었죠.” tvN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를 차용한 대사는 물론, 위성지도와 내비게이션을 연상시키는 대사들이 ‘아재개그’처럼 들린다고 전하니 “우리 (유)해진씨가 좋아하겠네”라며 역시 개그로 답했다.
대동여지도를 독점하려는 흥선대원군과 김씨 세도가의 다툼 속에서도 “지도는 백성의 것”이라며 신념을 지킨 김정호. 차승원은 진정성 어린 연기로 그 신념을 설득해낸다.
웃기지만 우습지 않은 남자
차승원은 여느 배우들과 달리 망가지고 웃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도 배우로서의 신비감은 잃지 않는다. “‘삼시세끼’에서 차승원씨가 설거지를 마친 뒤 행주로 싱크대 물기를 싹 닦아내는 모습이 가장 멋있어요.” 맞벌이 직장인 김혜진씨의 말이다. ‘차줌마’(차승원+아줌마)는 야무진 손끝으로 빚어낸 놀라운 살림솜씨와 요리실력으로, 부엌에서의 남녀평등을 꿈꾸는 수많은 여성들의 판타지를 대변하며 호감도 A급 연예인으로 자리잡았다.
시장은커녕 조그만 동네슈퍼도 문닫기 일쑤인 외딴 섬 만재도에서 차승원은 물고기와 텃밭 채소들로 삼시세끼를 뚝딱 차려냈다. 당황한 제작진이 회전초밥과 어묵 같은 고난도 식단을 요구해도 그럴싸하게 해냈다. 이제 식당에 가면 ‘직접 요리해 먹지 뭐하러 왔냐’는 얘기까지 듣는다고 한다. “우리끼리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거예요. 그래서인지 ‘삼시세끼’ 집에 내려가면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돼요. 제작진이 뭘 요구하는 것도 없어요. 저랑 해진씨가 아침 일찍 일어나니까 스태프들이 도리어 힘들어하죠.(웃음)”
최근엔 전북 고창으로 옮겨 유해진, 손호준, 남주혁과 알콩달콩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다. “예전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무엇이든 제가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죠. 요즘엔 순리대로 살려고 해요. 욕심이 과해지면 집착이 되고, 그러다 실패하면 그 충격이 꽤 크거든요.”
좋은 배우보다 좋은 사람이 먼저
놀랍게도, 그는 내년에 데뷔 30년을 맞는다. 이제 겨우 40대 중반인데. 1988년 11월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고교 3학년 때였다. 서구적인 외모와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분위기로 패션 관계자들의 눈길을 끌면서 단숨에 톱모델로 성장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면서 연기로 발을 넓혔다. 모델 출신 배우 1세대인 셈이다. 지금도 그는 뿌리를 잊지 않고 종종 패션쇼 런웨이에 선다.
차승원이 배우로서 두각을 드러낸 건 2000년 ‘리베라 메’부터다. 이후 영화 ‘신라의 달밤’(2001)과 ‘광복절 특사’(2002) ‘선생 김봉두’(2003) ‘박수칠 때 떠나라’(2005) ‘시크릿’(2009) ‘포화속으로’(2010), 드라마 ‘시티홀’(2009) ‘아테나: 전쟁의 여신’(2011) ‘최고의 사랑’(2011) 등 여러 작품에서 활약했다. 영화 ‘이장과 군수’(2007)에선 평생의 벗 유해진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출연작에서 코미디의 비중이 단연 높지만, ‘혈의 누’(2005)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같은 사극에선 묵직하고 진중하게 존재감을 빛냈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08)에선 살벌한 악역도 소화했다. 영화 ‘아들’(2007)과 ‘국경의 남쪽’(2006) 같은 휴먼드라마는 차승원의 감정 연기에 많은 부분을 빚졌다.
30주년을 앞둔 지금 차승원은 ‘좋은 배우’가 아닌 ‘좋은 사람’을 꿈꾸고 있다.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이 연기도 잘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보다 타인이 싫어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게 더 좋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해요. 존중과 배려가 바탕이 됐다는 의미니까.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만나겠죠. 누구에게든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제가 지나온 길을 후배들이 바라볼 수 있는 인생 선배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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