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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더치 페이’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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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더치 페이’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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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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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10여 년 전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방송됐던 미국 HBO의 10부작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독일 항복 직후 주인공 리처드 윈터스(데이미언 루이스 분) 소령이 입대 초기 괴롭혔던 옛 상관 허버트 소블(데이비드 슈위머 분) 대위를 만난다. 무공으로 윈터스가 거듭 승진, 소블은 하급자가 된 상태다. 소블은 짐짓 외면하고 지나가려 한다. 윈터스가 억지로 세운 뒤,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아닌 계급에 경례하는 거네”(We salute the rank, not the man). 그러자 소블도 몸가짐을 바로 하고 거수 경례를 한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개인주의ㆍ합리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라면 ‘지위 불일치’로 여겨질 많은 일들이 미국 직장에서 수시로 목격된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대졸 매니저들이 40, 50대 하급자를 엄격하게 감독한다. 주방용품 매장에서 기자가 불량품 반품 지연을 항의하자, 앳된 얼굴의 백인 여성이 흰머리 성성한 중년 여성 직원을 불러 나무라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쩔쩔매는 중년 여성에게서 나이 어린 매니저에 대한 반감은 찾을 수 없었다.

개인주의ㆍ합리주의는 미국 사회전반의 원칙이다. 같은 일을 해도 먼저 입사한 사람이 더 받는 ‘연공급’(年功給)이 한국의 원칙이지만, 미국은 다르다. 나이, 부양가족 유무에 상관 없이 일의 난이도에 따라 월급이 달라지는 직무급(職務給)이 일반적이다. 인사고과도 마찬가지다. 연차에 따라 특정인을 승진시키기 위해 같은 부서에서 인사고과 점수를 몰아주는 한국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하는 방식도 다르다. 퇴근 시간은 윗사람일수록 늦어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에 파견 나온 우리 공무원들이 가끔 무능력자로 오인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처럼 하루 빨리 업무를 파악하려고 퇴근 시간 이후 남아 있으면, 정해진 시간에 일을 마치지 못한 한심한 인물로 찍힐 뿐이다. 이직 경험이 많은 사람이 능력자로 분류되는 만큼 직장에서 공동체 의식도 희박하다. 조직 단합을 위한 회식도 없다. 상사는 관리자일 뿐, 부하를 동생처럼 보살피는 온정적 모습은 기대하기 힘들다.

규제기관에 대한 민원 청탁도 직원이 몸으로 때우지 않는다. 회사 돈으로 고용한 전문 로비스트에게 맡기고, 사후 보고를 받는 게 원칙이다.

이런 개인주의 문화가 사교 문화의 일단으로 표출된 게 ‘더치 페이’다. 식당에서 선배라는 이유로 연장자가 식대를 내는 경우는 없다. 밥 먹고 나면 각자 자기 몫의 신용카드를 꺼낸다. 직장 동료라도 업무 이외에는 눈치 볼 필요가 없고, 실적 뛰어나면 인사고과에서 물먹을 일없는 환경이 광범위한 ‘더치 페이’를 가능하게 만든 배경일 것이다. 다른 사람 밥값까지 내가며 굳이 한 식구라는 걸 되새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이달 말부터 한국에서는 ‘김영란 법’이 실시된다. 내수 침체, 소비의 낙수효과 감소 등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단 한번 해보자’는 일반 정서 때문에 강행이 결정됐다. 이 법이 가져올 변화와 파장에 대해 다양한 예측이 나오지만, 확실한 건 사회 전반에 ‘더치 페이’확산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더치 페이’가 정착되려면, 미국처럼 개인주의ㆍ합리주의ㆍ업적주의부터 인정해야 한다. 밥값 내는 방식만 고치는데 그치지 않고 일해온 방식,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여전한 청탁 수요 때문에 다양한 변칙거래로 이어지고 지키기 힘든 ‘김영란 법’을 어긴 수많은 잠재적 범죄자만 양산될 것이다. 법 시행 후 현실에 맞는 미세조정이 꾸준히 뒤따라야 할 것이다. 조철환ㆍ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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