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첫날 아침.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지난주 전당대회를 통해 더민주의 새 당 대표에 뽑힌 추 대표가 전임자인 김 전 대표와 지도부를 ‘모시고’ 밥 한끼 할 생각으로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추 대표가 전날 김 전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식사 자리를 마련하려 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전현직 대표단의 아침 식사 자리라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들이 많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당대회를 전후해 추미애-김종인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아슬아슬한 발언들을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면 같은 당 사람이 아닌 다른 당 사람처럼 말이죠. 심지어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상황을 놓고 진실 공방까지 벌이고 심지어 김 전 대표는 추 대표를 향해 '고발'이라는 단어까지 꺼냈으니까요.
냉랭할 것만 같았던 두 사람 사이를 녹여 준 것은 '박경미 신임 당 대변인'과 '이어달리기' 였습니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추미애(추)=오늘 광주비엔날레 갑니다.
김종인(김)=대표 되고 (광주) 처음 가는 건가요.
추=네. 근데 간지 얼마 안 됐어요. 봉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계시니까 가고. 광주는 비엔날레 때문에 가는데 간 김에 광주 민심도 들을 겸해요. 저 종횡무진입니다.
김=광주 가면 제일 먼저 5.18국립묘지부터 가는 건가요.
추=바꿨습니다. 민심 청취를 위해 저녁에 막걸리파티 하기로 했어요. 대표님도 같이 가시면 좋았을 것 같아요.
김=몇 번 갔었어요. 대변인들 보니까 잘 고른거 같아요. (일동 웃음) 금태섭도 그렇고 박경미도 그렇고 자기 몫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추=금태섭 일성이 자기는 인물로 뽑혔고, 박경미는 실력으로 뽑혔다고. 자기 잘생겼다를 그렇게 (말하네요). 박경미 대변인도 못지 않게 미인이에요.
김= (박경미 대변인은) 언론을 많이 해봐서 잘 할거예요. 언론사 비상근 논설위원도 여러 곳 하고 그래서요. 나는 사실 박경미 의원 전에 전혀 몰랐어요. 모르다가 마지막 (비례대표) 여성 (후보) 중에서 특이한 사람을 뽑아야겠다 생각하고 수소문하다가 언론 경험도 있고 글도 많이 쓰고 그 때 마침 알파고 얘기해서 수학이 중요한 역할 한다고 해서 뽑은거예요.
추=여러분들이 박경미 대변인 칭찬이 자자하세요.
김=아주 똑똑한 사람이에요.
추=이번 인사는 적재적소로 했습니다.
지각 참석자들을 기다리며 두 사람은 박경미 대변인을 화제로 올린 것인데요. 김종인 대표 체제에서 이뤄진 비례대표 공천에서 전체 1번이었던 박경미 의원을 추 대표가 신임 당 대변인으로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박경미 예고편'으로 초반 분위기가 예상보다 잘 풀리고 나자 본격적으로 '본편'이 펼쳐졌는데요.
자리를 마련한 추 대표가 먼저 인사말을 시작했습니다.
“(김종인) 비대위 체제가 있음으로 인해 우리가 4ㆍ13 총선을 안정감 있게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총선 직후에도 여러 논란 없이 잘 이끌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전당대회가 굉장히 길고 해서 그때그때 소통하고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계속 대표님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당을 이끌었는지를 미뤄 헤아릴 수 있었구요. 앞으로 이어달리기 한다는 자세로 하겠습니다. 김 대표께서 비대위원들과 잘 다져놓은 것을 바통을 이어받아 지지자들에게 안정감을 주면서 집권 희망 가질 수 있는 당 운영을 할 것입니다. 목표는 집권이니까 대표님께 수시로 고견 여쭈고 지도부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표님도 그 동안 잘 되자고 하는 얘기가 정돈 안 된 채로 흘러나갔다면 이해를 좀 해주시고 집권을 향한 단일한 목표 속에서 대표님의 지도 편달을 부탁 드립니다.”
한 참석자에 따르면 특히 이어달리기라는 단어를 비롯해 김 대표를 이어 받겠다는 말이 나올 때 김 대표의 표정은 매우 밝아졌다고 합니다. 추 대표는 김 대표와 각을 세웠던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지도편달’을 바란다고 마무리했습니다.
다음은 김종인 전 대표의 답.
“대선을 앞두고 우리 일반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회현상이 어떤지를 우리가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지난 총선에서 3당이 경쟁했지만 더민주만큼 뚜렷한 슬로건을 제시한 정당이 없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일반 유권자들에게 각인이 됐습니다. 때문에 지난 총선에서 우리가 내세운 슬로건을 앞으로 대선과 어떻게 연결 할 지가 제가 볼 때 대선 준비과정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최소한 이번 정기국회와 내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경제민주화의 상징적인 법안 몇 개는 반드시 통과시켜야 합니다. 지난 대선보다 국민들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인식이 강해졌습니다. 그 점을 잘 이끌어가면 내년 대선까지 큰 무리 없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식사 자리를 함께한 한 신임 최고위원은 분위기가 어땠느냐는 기자에게 “깜짝 놀랐어요. 사실 나도 조마조마 했거든요. 근데 괜한 걱정이었어요. 추 대표가 김 대표께 예의를 갖춰 모시려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김 대표도 중간중간 자주 웃으시고요. 특히 초반에는 박경미 의원 얘기로 분위기가 참 좋았고 중간에 이어달리기 나올 때 김 대표님 표정이 밝으셨어요. 추 대표를 비롯해 신임 지도부는 앞으로도 김 대표님에 대해 진심으로 예우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새삼 느꼈어요.”
전대 전후 당 안팎에서는 추 대표와 김 전 대표를 보고 “다시는 안 볼 사람들처럼 각을 세운다”고들 했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날 아침 식사 자리는 “그 두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화기애애 했다는 게 참석자들의 전언입니다. 아침에 으르렁거리다가도 오후에 웃으며 악수하고 저녁에 서로 껴안는 게 정치인들입니다.
그 점을 감안하면 이날 아침 좋은 분위기도 이날뿐일 수도 있죠. 그러나 내년 대선까지 당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정권 교체를 이뤄야 할 책임을 진 추 대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총선 1당’이라는 성적표를 거둔 김 전 대표의 경륜이 꼭 필요합니다. 당 대표에서 물러나 평의원이 된 김 전 대표로서는 내년 대선 정국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추 대표와 관계를 굳이 나쁘게 유지할 필요가 없겠죠.
물론 이런 화기애애 분위기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특히 추 대표 당선에 큰 역할을 한 친노(노무현)ㆍ친문(문재인) 진영과 그 지지자들이 김 전 대표를 한없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당 대표 때야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어도 참았다 해도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 지 모르니까요. 때문에 한가지 궁금해 지는 게 있습니다. 바로 김 전 대표의 전임자이자 김 전대표를 당으로 모신 문재인 전 대표와 김 전 대표의 관계 입니다. 두 사람 역시 추 대표와 김 전 대표 사이만큼 냉랭한 것으로 알려졌으니까요. 당 안팎에서는 조만간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요. 두 사람의 만남에서는 또 어떤 메뉴가 ‘박경미, 이어달리기’처럼 분위기를 좌우하게 될 지 그 점도 흥미롭습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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