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은 고약하고 수줍다. 삶의 과즙이 넘칠 때도 굳이 소주잔만한 잔을 내민다. 잔이 다 차지 않으면 부끄러우니까. 저 과즙이 언제 끊길지 모르니까. 그래도 잔을 거두지 않은 채 말한다.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김중혁 작가의 신작 ‘나는 농담이다’(민음사)가 나왔다. 전작인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그의 첫 연애소설(정확히는 관계에 대한 소설)이라면 이 책은 좀더 본격적이다. 등장인물들은 여전히 과즙 한 방울에 허덕이고 축제처럼 잔이 넘치는 일도 없지만 어쨌든 연애소설이다.
이일영과 송우영은 아버지가 다른 형제지간이다.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은 없다. 클럽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일하는 송우영은 어머니가 죽고 난 뒤 수신자가 이일영으로 된 편지를 들고 그를 찾아가지만, 우주비행사인 이일영은 불의의 사고로 관제선과 연결이 끊어져 우주를 떠돌고 있는 중이다. 소설은 이일영이 우주에서 보내는 메시지와 송우영이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이일영의 이름은 우주 비행이 꿈이던 아버지가 로켓 발사 시 카운트다운을 한글로 만들어 지은 것이다. 열렬한 갈망을 이루지 못한 채 아버지는 자동차 사고로 죽고 이일영의 꿈은 자연스럽게 우주비행사가 된다. 우주미아가 된 지금 그는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떠났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어머니, 지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자 강차연, 그 밖에 누가 될지 모를 수신자들을 향해 계속 메시지를 보낸다.
“관제센터, 들리나? (…)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시간 속인지 공간 속인지 명확하지 않다. 공간을 가로질러 시간을 넘나들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다른 시간으로 가로질러 가는 통로가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다. 아무 데로나 문을 열고 들어가 볼까. 이 목소리가 대체 어디로 향할까.”
그리운 사람이 있고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있는 이일영과 달리 송우영은 현실을 피해 농담 속으로 숨는다. 엄마, 엄마의 전남편, 만난 적 없는 이부형제까지 모두 그의 개그 소재다. 엄마의 죽음으로 그의 농담이 잠시 휴식에 들어갈 때, 누나뻘인 동료 코미디언 세미의 넋두리가 그를 찌른다.
“웃는 건 여자들이 잘하는데 코미디언은 남자들이 엄청 많잖아. 왜 그런 줄 알아? (…) 남자들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야. (…) 코미디의 핵심이 뭐냐. 거리 두기 아니냐. 거리를 둬야 웃길 수 있고, 상황에 빠져들지 않아야 비꼴 수 있는 거잖아. 여자들은 웃을 때와 슬퍼할 때를 구별할 줄 알지만, 남자들은 그걸 잘 못해. 무조건 웃긴 게 최곤 줄 안다니까.”
농담으로 삶과 거리를 두는 송우영과 지구로부터 물리적으로 유리된 이일영은 어찌 보면 비슷한 처지다. 송우영은 삶과 도킹하지 못하고 이일영은 영원히 엄마를 볼 수 없게 됐다. 만날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는 우주로 끌고 간다. 송우영과 강차연, 세미는 엄마의 편지를 음성으로 만들어 우주로 쏘아 보내기로 한다. 이제는 목소리로만 남은 엄마와 아들이 우주에서 만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 인력과 척력에 매인 지구에서 불가능했던 만남이 우주에선 허망할 만큼 자유롭다. 중력에 붙들린 지구엔 희망이 없다는 작가의 저주일까, 쿨하디 쿨한 우주식 사랑에 대한 작가의 갈망일까. 차기도 덥기도 거부하는 특유의 온도가 초가을과 더없이 잘 어울린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