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 맞불ㆍ꼬리 자르기 급급 유감
사표 수리와 대충 사과론 책임 못 벗어
독립적 조사로 유착 진상부터 밝혀야
비리 의혹 제기는 대개 누군가의 제보나 폭로를 실마리 삼아 이뤄진다. 의혹의 내용뿐 아니라 폭로의 배경 혹은 방법이 종종 도마에 오르는 이유다. 복잡한 이해와 다툼이 얽힌 사안일수록 두 프레임은 격하게 충돌한다. 이럴 때 손쉽게 기대는 것이 진영 논리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진보’정권 10년, 이후 ‘보수’ 재집권 9년을 지나오면서 숱하게 목도한 일이다. 우리 편의 유불리를 따져 취사선택된 사실들의 조합 앞에서, 숱한 의혹들은 게으른 진실이 당도하기도 전에 힘의 논리로 정리되곤 했다. 돈과 권력이 얽힌 수많은 의혹의 시시비비를 제때 가렸다면 우리 사회가 이토록 지독한 불신의 늪에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온 나라를 헤집어 놓은 우병우 의혹과 일련의 사건 전개에서도 그런 구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내 편ㆍ네 편의 경계선이 ‘보수’ 진영 한복판에 먼저 그어졌다는 점이다.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심지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족들까지도, 불순세력 딱지를 붙여 공격하는 데 의기투합했던 그들이 서로를 향해 거친 삿대질을 해대며 막장 폭로전을 벌이는 모습은 괴기스러울 만큼 낯설다.
시시각각 새로운 팩트(혹은 주장)가 등장하는 이번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권력형 비리의 전형인 우병우 의혹이 본질인가, 언론자유를 방패 삼아 특혜를 누려 온 조선일보가 더 나쁜가 하는 양자택일식 논쟁은 무의미하다. 한때 동지였던 나쁜 놈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으로 싸잡아 비난하고 마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다. 청와대는 비리와 실정을 얄팍한 음모론으로 덮으려는 옹졸한 작태를 당장 그만둬야 한다. 이미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민심을 살피고 때론 칼을 휘두르는 민정수석의 자격을 잃은 우병우씨는 당장 물러나야 옳다. 더불어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의 검은 유착 의혹 역시 진상이 철저하게 밝혀져야 한다.
청와대와 우씨에 대한 비판에는 말을 더 보탤 필요가 없다. 이제 더 깊게 들여다 봐야 할 건 송씨 문제다. 그를 둘러싼 의혹은 영화 ‘내부자들’에 나온 조국일보 논설주간 이강국의 행태를 황당한 픽션에서 개연성 짙은 추문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만이 아니라 언론계 전체가 온몸에 똥물을 뒤집어쓴 꼴이 됐다.
그런데도 조선일보의 대응은 실망스럽다 못해 분노를 느끼게 한다. 대다수 기자들은 듣도보도 못한 초호화판 외유를 “기업 초청을 받은 통상적 출장”이라 강변하는 송씨의 해명을 전하더니 실명이 공개된 뒤에도 본인의 사의를 수용한 주필 보직 해임만 공표했다가 추가 의혹이 제기돼 파장이 커지자 부랴부랴 사표를 수리했다. 31일자 신문 1면에 게재된 221자 분량의 사과문도 마지못해 내놓은 듯 무성의하기 짝이 없다.
기업에서 해외 출장을 보낼 때는 출장의 목적과 세부 일정, 비용 부담 등을 명시해 결재를 받도록 돼 있다. 몰래 휴가 내고 간 것이 아니라면 소속 부서 책임자와 경영진이 모를 수 없다. 그런데도 아무런 해명이 없다. “제기된 의혹들은 향후 엄정하게 시시비비가 가려질 것”이란 피동형 문장에선 이 문제를 한사코 개인의 일탈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언론이 비리 사건을 다룰 때 숱하게 비판한 ‘꼬리 자르기’의 전형이다. 실제로 그런 의도를 드러낸 사설까지 실었다.
사설의 주장대로 “권력 비리의 의문을 갖고 발로 뛰어 파헤친” 일선 기자들은 졸지에 ‘부패 기득권 세력’의 일원이 돼버린 지금 어떤 심정일까. 더구나 송씨의 의혹은 호화 외유만이 아니다. 조선일보 다른 인사의 비리 연루설까지 흘러나온다. 기자들이 떳떳하게, 더 집요하게 권력의 비리를 파헤칠 수 있게 하려면 200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송씨 관련 모든 의혹의 진상, 나아가 경영진의 인지 및 개입 여부를 스스로 조사해 밝혀야 한다.
조선일보가 내세운 ‘1등 신문’이란 다소 민망한 수식어가 신문 발행부수나 온라인 트래픽 1위만 뜻하지는 않을 게다. 지금이야말로 ‘1등 신문’다운 모습을 보여야 할 때다.
이희정 디지털부문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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