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보안시스템 밀어붙이는
입주자대표회의서 해고 통보
법원 ‘결의 무효’ 확정 판결 전
공사 90% 끝나 고용 장담 어려워
“반 년 넘게 맘 졸이면서 힘을 보태주신 주민들을 위해 버텼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입니다.”
31일 오후 서울 강서구 D아파트 입구에서 장대비를 맞고 서 있던 경비원 박모(71)씨는 4년 동안 일했던 경비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올해 2월 인건비 절감과 무인 통합전자보안시스템 도입을 이유로 경비원 44명에게 고용계약 만료를 알렸던 D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대표회의) 측이 이날 재차 경비원들에게 해고를 통보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비원들이 해고 위기에 놓이자 뜻있는 아파트 주민들은 천막농성을 하고 보안시스템 설치를 반대(본보 2월18일자 12면)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논란이 커지면서 아파트관리소 측은 경비원들과 두 달씩 계약을 맺는 식으로 고용을 승계해 왔다.
박씨는 “계약 만료를 공지 받았을 때와 달리 이번엔 (해고를 거부할 경우) 경비실 전기와 수도도 모두 끊겠다는 엄포까지 들었다”며 “우리를 지지해 준 주민들 덕분에 가까스로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됐는데 또 다시 거리로 내몰려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불과 지난 주만해도 경비원들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서울남부지법이 지난 25일 ‘D아파트 대표회의의 보안시스템 도입 결의는 무효’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경비원들에 대한 구제책도 마련되는 듯했다. 재판부는 보안시스템 도입으로 실행될 경비실 폐쇄는 주민 3분의2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하고, 주민들이 납부하는 돈을 주요시설 신설에 사용할 경우 입주자 절반 이상의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대표회의는 이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표회의 측은 지난 3월 경비원 해고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본안 판결이 나올 때까지 보안시스템 공사를 중단해달라며 법원에 낸 가처분 신청이 기각됐기 때문에 공사는 정당하다는 입장이다. 대표회의 관계자는 “가처분이 받아 들여지면 시스템 구축 사업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으나 법원이 기각해 공사를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표회의는 결의 무효 판결도 항소할 계획이어서 공사 진행과 경비원 해고에 절차상 문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현재 보안시스템 설치는 90% 정도 완료된 상태다.
반면 반대 측 주민과 경비원들은 대표회의가 소송을 최대한 끌면서 시스템 설치와 해고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주민 안모(54ㆍ여)씨는 “대표회의는 해고 위기에 놓인 경비원들과 대화하거나 최소한의 설득 노력도 외면한 채 확정 판결이 나기 전에 서둘러 작업을 끝내려 밤샘 공사만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 주민인 김승현 노무사도 “대표회의 의결 자체가 무효라는 법원 판단은 무시하고 계류 중인 가처분 소송을 근거로 공사를 강행하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루한 법정 공방이 예고되면서 경비원들은 당분간 업무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커졌다. 소송을 맡은 윤지영 법무법인 공감 변호사는 “본안 판결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려 그 사이에 공사가 끝날 경우 어떤 식으로 판결이 나더라도 혼란만 가중돼 경비원들의 고용도 장담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글ㆍ사진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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