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혜성처럼 등장하…지는 않았고, 원래 존재했지만 최근 전성기를 맞이한 단어가 있으니 바로 ‘취향’이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이것은 ‘취존’이라는 줄임말로 거듭났고, 취향을 존중하지 않으면 ‘취X’이라는 반의어ㆍ신조어까지 생겼다. 의심할 나위 없이 다양한 삶의 형식과 선택들, 취향을 존중하기란 현대인의 필수 덕목일 것이다. 그런데 이 ‘취향’이 점점 어디에나 끼얹는 치즈, 아무 문이나 여는 만능열쇠,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오남용 되고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취향이고, 무엇이 존중인지 애매모호하고 의심스러운 형태로.
취향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으로, 테이스트(taste)는 ‘취미’로도 번역된다. 일본 디자인학자 진노 유키는 ‘취미의 탄생 : 백화점이 만든 테이스트’(문경연 역, 소명출판, 2008)에서 1900년대 일본의 백화점 탄생과 연결 지어 취미(취향)의 문화사를 조망한다. 그는 취미가 예술에 대한 미적 가치관, 일상생활의 호불호 판단, 그리고 오락이라는 세 가지 층위에서 지시되는 범주의 변용과 관계성을 추적한다. 근대의 취미는 이 범주를 모두 아울러 자신을 개성적인 누군가로 만드는 ‘라벨’이다. 취미 또는 취향은 ‘타자와의 차별화를 위한 기호’이고, ‘극도로 유동적인 가치관’이자 ‘매시기 마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유행’이다. 취향이 곧 나를 대변하는 대(大)취향의 시대, 모든 것은 취향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서 녹아 꿀꿀이죽처럼 뒤섞인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가벼운 논쟁을 벌였다. 상대방은 소위 ‘빠순이’에 대한 불호를 드러내면서 그것이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양성 사회를 살아가는 나는 존중하고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멸시 받는 집단을 싫어하는 것은 개인의 감정이나 취향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이다. 장애인이나 유색인종에 대한 감정이 호불호를 논하는 ‘취향’의 영역이 아니듯. 판단에는 사안의 맥락과 층위에 대한 독해가 필요하다. 여자 연예인의 브래지어 미착용은 당사자의 취향이기 때문에 “싫으면 안 보면 되”지만, 공개적으로 특정성별을 비하한 발언은 명백한 폭력이기 때문에 사회적 차원의 제재가 필요하다. 이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면 ‘사회적 약자들을 보고 싶지 않거나/구조적 폭력을 좋아하는 취향’을 존중해달라는 헛소리를 하게 된다.
취향이라는 알리바이는 부정적 언급이나 비판을 막는 방어적 기능을 수행하고, 사안의 정치성이나 맥락을 삭제하고 비무장지대인 ‘존중’으로 끌고 간다. “~까살”이라는 말은 “~을 까면 사살”의 줄임말로, 신성불가침 영역에 도달한 취미의 위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도식 안에서 존중은 부정적인 언급을 피하는 소극적이고 무해한 실천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비평이나 비판은 ‘취X’이라는 파렴치하고 편협한 행위가 된다. 그러나 취향 또는 취미는 ‘나’에게 미적 판단의 대상이듯, 누군가에게는 비평의 대상이다. 존중은 아무런 운동성 없이 내버려둔다는 뜻이 아니며 논의의 스펙트럼 안에서 ‘나’의 미감 역시 확장되고 유동하며 상승할 수 있다. 또한 ‘나’가 좋아하는 무언가가 비평의 대상이 된다거나 낮은 평가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을 즉각 ‘나’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할 필요도 전혀 없다. 소비사회에서 취향과 자아는 분리불가능하게 엉겨 붙어 버렸지만 의연하게 자신의 취향을 존중하며 ‘좋음’을 유지하면 될 일이다. 취향의 진짜 재미있는 점이 거기에 있다. 모두가 최상의, 유일한 하나를 좋아하고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 분명히 문제적인데 속절없이 끌린다면, 그것이 나라는 인간의 질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현상한다. 완벽한 것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인간은 온전하고 좋은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미완이나 흠결에 기꺼이 매혹되기에 더 특별한 존재이다.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