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ㆍ한남패치 운영자 검거
“공공의 이익과 알 권리 위해”
개인적 질투 등이 공명심 둔갑
‘해외 서버는 수사 못할 것’ 과신
계정 30차례 바꾸며 범행
인스타 협조… 모방범죄 ‘경종’
회사원 정모(24ㆍ여)씨는 평소 자주 가는 서울 강남 클럽에서 마주친 국내 한 기업 회장 외손녀 A씨를 향해 남모를 질투심을 키웠다. 단역배우와 쇼핑몰 모델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신의 처지와 비교해 A씨는 부모 잘 만나 화려한 인생을 즐기는 ‘금수저’라는 생각이었다. 정씨는 상대적 박탈감을 엉뚱하게도 생판 모르는 타인들에 대한 적대감 표출로 해소했다. 지난 5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 연예계와 스포츠계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무차별적으로 고발하는 ‘강남패치’를 만든 것이다. 스캔들을 주로 폭로하는 연예매체 이름을 본떴다.
한달 뒤 가수 겸 배우 박유천(30) 성폭행 사건 당시 강남패치는 박유천을 고소한 여성의 사진을 올려 일약 주목을 받았다. 실제로는 엉뚱한 여성의 사진이었지만 정씨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출처 불명의 제보를 받아 유흥업소 종사자 얼굴사진과 이름, 전화번호를 올리며 더욱 세를 불렸다.
강남패치가 한창 이름을 날리던 6월 양모(28ㆍ여)씨는 바람 피운 남성을 고발하는 한남패치 계정을 열었다. 3년 전 성형수술에 수 차례 실패한 뒤 성형외과 의사와 송사를 벌인 일이 동기가 됐다. 양씨는 겉과 속이 다른 남자들을 고발하겠다는 명목으로 메신저 등으로 제보를 받아 일반 남성에 대한 폭로에 돌입했다. 남자들의 얼굴 사진과 함께 “첫 만남에 성관계를 요구했다” “술을 먹이고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는 제보가 쏟아졌고, 양씨는 제보의 진위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가감 없이 사진을 올렸다. 이 패치들의 인기와 함께 임산부 좌석에 앉는 남성을 폭로하는 오메가패치 등 아류 계정이 속속 이어졌다.
상대적 박탈감과 분풀이가 범행의 동기였지만 계정 운영자들은 이를 ‘공익 실현을 위해 폭로한다’는 그릇된 공명심으로 둔갑시켰다. 여성혐오와 남성혐오 이슈와 맞물려 사회적 주목도가 높아지면서 이들의 영웅심리는 더욱 부풀었다. 양씨는 성형외과 의사에 대한 분풀이를 비양심적 남성에 대한 고발이라고 여겼고, 정씨 역시 경찰 조사에서 “(신상이 털린) 대상이 특별히 피해를 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타인을 해할 목적으로 신상 털기가 이뤄졌다면 패치 운영자들은 정의를 실현한다는 허황된 관념에 빠져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정씨는 피해자들의 신고로 계정이 폐쇄되자 30여 차례 계정을 바꿔가며 강남패치를 이어갔고, ‘훼손될 명예가 있으면 날 고소하라”며 피해자들을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자신이 받은 제보를 한남패치에 넘겨주기도 했다. 한남패치 게시물을 돈벌이에 악용한 김모(28)씨도 나타났다. 그는 게시물을 자신이 개설한 사이트로 옮긴 뒤 삭제를 요구하는 피해자들에게 200만원 상당 금품을 요구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법을 농락하며 혐오와 폭로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해외에 서버를 둔 인스타그램을 범행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양씨는 개인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하지 않는 인스타그램의 개인정보취급방침을 확인한 후 계정 운영이 들통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패치 범죄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면서 이들의 범죄는 막을 내렸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타인의 사생활을 유포한 혐의(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상 명예훼손)로 정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30일 밝혔다. 서울 수서경찰서도 이날 양씨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김씨 역시 공갈미수 혐의로 함께 입건됐다.
해외에 서버를 둔 SNS의 경우 수사가 어려웠으나 경찰청이 직접 수사 협조를 요청하고 나서면서 인스타그램 측도 보안정책을 완화했다. 특히 한남패치 사건은 고소인이 명예훼손뿐 아니라 협박ㆍ공갈 혐의로 계정 운영자를 고소한 덕분에 해당 인터넷주소(IP)의 압수수색이 허용됐다. 강남패치 역시 100여명의 신원이 공개되는 등 피해가 확산되자 심각성을 인식한 인스타그램 측이 자발적으로 수사에 도움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강남패치와 한남패치 운영자 검거를 계기로 해외 SNS 수사도 한층 수월해질 것으로 보인다”며 “허위사실 폭로 행위를 지속적으로 차단하고 검거도 병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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