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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몬 막사이사이

입력
2016.08.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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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8월 31일

라몬 막사이사이의 단명이 끼친 필리핀의 정치적 불운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 이어지고 있다. 위키피디아.
라몬 막사이사이의 단명이 끼친 필리핀의 정치적 불운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 이어지고 있다. 위키피디아.

필리핀 정치인 라몬 막사이사이(Ramon Magsaysay)가 1907년 8월 31일 태어났다. 그는 항일 독립운동가였고, 독립한 조국의 안정에 힘쓴 관료였고, 청렴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자신의 대통령 임기를 다 못 채우고 57년 3월 17일 비행기 사고로 별세했다.

막사이사이는 본섬인 루손 섬 이바(Ib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문학교 교사였으나 미국인 교장과의 갈등으로 실직한 뒤 어렵사리 가족을 부양했고, 막사이사이도 호세 리살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뒤부터는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버스 정비노동자, 미국인이 운영하던 운송회사 관리인 등으로 일했고, 2차대전이 발발할 무렵부터 항일 운동에 가담해 미군이 필리핀을 탈환할 즈음에는 마닐라 서부 잠발레스 지역 게릴라군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해방된 조국의 지역 군정장관을 거쳐 정계에 진출해 하원의원이 됐고, 국방부 장관을 지낸 뒤 1953년 대통령이 됐다.

필리핀 공산당은 항일운동 시기부터 세력이 막강했다. 독립 이후 정치적 안정의 관건도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막사이사이는 친미파였고 반공주의자였다. 국방장관이 된 그는 공산주의 반정부 게릴라 후크발라하프(일명 후크단)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그들의 거점이자 지지기반이었던 농촌지역에 지원을 확대해 민심이 이탈하는 것을 방지했고 반군 귀순자 정착 지원정책을 펼쳤다. 게릴라 출신인 그의 대게릴라 섬멸 전략은 큰 성공을 거뒀고, 대중적 지지와 더불어 ‘아시아의 아이젠하워’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지지층은 농민 등 서민층이었다. 그 자신이 필리핀의 전통적 지배층인 지주ㆍ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서민 출신이었고, 말레이 혈통이었다. 임기 중에도 가족 등 측근의 특권과 특혜를 철저히 배제했고, 자신의 의전을 간소화하는 등 탈 권위적인 면모를 과시했다. 도로나 교량 등 사회인프라를 건설할 때마다 대통령 등 유력자의 이름을 붙이는 전통적인 관행조차 그는 거부했고, 교육 토지 복지 등 진보적인 개혁정책으로 지역 기반의 보수 의회와 경제ㆍ정치적 지배계급을 견제했다.

그는 필리핀 남부 세부의 산카를로스대학 강연 후 마닐라도 돌아오던 중 기상악화에 따른 항공기 사고로 수행원들과 함께 별세했다. 그가 남긴 재산은 생명보험증권 1매와 마닐라 교외의 낡은 집 한 채가 전부였다. 58년부터 수상자를 내기 시작한 막사이사이상은 필리핀 정부나 의회가 아니라 미국 록펠러재단이 출연한 기금(50만 달러)으로 제정ㆍ운영되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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