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미소, 아빠미소를 얼굴 가득 장착한 120여명 군중의 시선이 한 곳에 쏠렸다. 물개박수와 함께 누군가에게 함성을 보냈다. “브라운, 생일 축하해!” 브라운은 모바일 메신저 라인의 캐릭터인 ‘라인프렌즈’ 의 대표 캐릭터다. 지난 8일 서울 용산구 라인프렌즈 이태원 플래그십 매장에서 열린 브라운 탄생 5주년 생일파티의 한 장면이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여름 날, “캐릭터 생일잔치에 120명이나?” 하는 생각이 앞서지만, 이날 파티 참가자를 모집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의 참가 희망 댓글은 1,400개가 넘었다. 참가 경쟁률이 약 12대 1였던 셈이다. 팬들이 생일축하 노래를 합창하고 브라운과 기념 촬영을 이어가며 절정에 오른 이날 파티는 팬미팅을 방불케 했다.
#“대박, 구했다!” 지난달부터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한 마리의 수사자. 일명 ‘후디 라이언(Ryan)’이다. 올해 1월 카카오프렌즈가 선보인 갈기 없는 수사자 캐릭터인 라이언이 후드 상의를 입은 모습의 이 대형 인형은 5만9,000원에 육박하는 가격에도 품절이 이어진다. 회사원 A(28)씨는 “얼마 전 라이언을 산다는 친구와 실랑이를 벌였다”고 했다. “후라이언(후디 라이언의 애칭)”을 외치며 새로 문 연 서울 강남역 인근 카카오프렌즈 플래그십 매장에 줄 서려는 사람과 “이 나이에 무슨 짓”을 부르짖으며 말리는 일행. “도대체 왜? 이 더위에 저 줄을 서고 싶어?”를 추궁하는 주변을 향해 당사자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답했다고. “그냥, 너무 귀엽지 않아?” 지난달 2일 오픈 전부터 3,000여명이 줄을 서 장사진을 이뤘고, 매일 200~300명이 줄을 선 이 매장에는 한 달 만에 45만 명이 다녀갔다.
귀요미들, 찬미 받으소서
‘심쿵’ 경보로 곳곳이 들썩인다. 미키마우스, 헬로 키티, 곰돌이 푸 등 귀여운 캐릭터들이 사랑을 받은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메신저 캐릭터에 대한 키덜트(Kid+Adult)들의 짝사랑은 예사롭지 않다. 이런 기회를 놓칠세라 메신저 캐릭터들은 전문 매장뿐 아니라 다양한 컬래버레이션(협업) 상품으로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 한 켠을 차지하며 ‘키덜트 라이프’의 지평을 키워나가고 있다.
이마트는 6월 말 라인프렌즈 캐릭터를 넣은 수납함, 벽시계, 양치 세면도구, 도시락 등을 선보였고 홈플러스는 7월 초 카카오프렌즈 캐릭터 우산을 출시했다. 편의점도 질세라 우산, 우유, 빵 등에 캐릭터를 입혔다. 세븐일레븐은 지난달 카카오프렌즈 우산, 카카오프렌즈 교통카드, 개콘 프렌즈 우유, 원피스 빵 등을 선보였다. 뷰티 업계에서는 심지어 이런 캐릭터 협업 화장품들이 소장용으로 팔리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미샤의 라인프렌즈 에디션, 미니언즈 에디션, 더 페이스샵의 디즈니 에디션 등이 대표적이다.
패션업계도 분주하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반스’는 라인프렌즈와 협업한 운동화를 선보였고 삼성물산 패션부문 에잇세컨즈는 지난해 F/W시즌부터 SPA 업계 최초로 카카오프렌즈 라인을 선보여 90%의 판매율을 올렸다. 최근 지드래곤과 협업으로 보름새 17억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린 에잇세컨즈의 직전 협업 상대, 즉 지드래곤의 전임자가 카카오프렌즈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카카오프렌즈 협업 제품 출시 직후 2주간의 판매 실적은 전 시즌보다 86% 성장했고 온라인숍 예약판매에서는 판매량이 전년 대비 10배 가량 증가했다. 삼성물산은 SPA브랜드뿐 아니라 빈폴 액세서리에서도 카카오프렌즈 라인을 선보였는데, “귀엽기엔 너무 묵직한 아이템”, “모델 수지도 살리지 못한 무리수였나”라는 초반 반응에도 불구하고 파우치, 여권지갑 등이 출시 2주 만에 초도물량을 소진했다는 후문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관계자는 “소비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기쁨을 주는 캐릭터들을 패션에 녹여 공감의 매개로 활용하고자 하는 경향이 지난해부터 뚜렷해지고 있다”며 “캐릭터와 협업으로 트렌디한 감성의 20, 30대 고객들에게 다가가는 분위기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귀여운 게 좋아”는 인간본능
키덜트 라이프에 흠뻑 빠진 ‘어른이’들은 미간과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온몸으로 외친다. “아, 미쳤다. 너무 귀여워!” 귀여움이 최고 덕목인 이 시장과 시대의 정신을 ‘귀요미즘’ 쯤으로 불러도 될까. 귀요미즘은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는 문화와 만나 시너지를 낸다. 30대 회사원으로 브라운 생일 파티에 참가했던 네이버 블로거 ‘유니콘콘’씨는 “이제는 키덜트와 일반인을 나누는 경계가 애매모호하다고 생각한다”며 “누구나 라인, 카카오톡에서 대화를 할 때 캐릭터를 사용하고 주변에서 이들 용품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만큼 특정 ‘덕후’들의 문화를 넘어 일상의 한 부분이 돼 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같은 행사에 다녀온 블로거 ‘쟁토리’씨도 “과거보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관련 상품을 즐겁게 수집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지난 1월 펴낸 '2016년 콘텐츠산업 전망' 보고서에서 2011년 7조 2,000억원 규모였던 국내 캐릭터 산업 매출액이 2014년 9조 1,000억원을 기록하며 20%대의 성장세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9조 8,000억원에 달하고, 올해는 거기서 11.4% 늘어난 1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이런 성장의 배경에는 ▦1인 가구 및 싱글족 증가 ▦자기 중심의 소비문화 확산 등을 토대로 한 ‘키덜트 시장의 확대’가 자리잡고 있다.
귀요미즘 현상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일본 구마모토(熊本)현에서 열린 구마모토현 캐릭터 ‘구마몬’ 생일 잔치에는 150여명의 손님이 몰렸고, 앞줄을 차지하기 위해 새벽부터 행사장 앞을 지킨 팬들 이야기가 해외 언론에 소개될 정도였다.
아이돌 못지 않은 팬덤을 이끄는 이런 캐릭터들의 ‘귀여움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를 비롯한 학자들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귀여운 외양을 ‘베이비 스키마(Baby schema)’란 용어로 설명해왔다. 부모의 보호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포유류 새끼들이 사랑 받을 수 밖에 없는 외양으로 육아행동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모성 혹은 부성애를 자극하는 아기의 통통한 볼, 큰 눈, 둥근 머리, 작은 코와 턱, 통통한 팔 다리 등은 생존을 위한 무기다. 반대로 성장을 완성한 포유류는 새끼들의 이 귀여운 외양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개체 생존이 거듭된다.
사회학적으로는 20세기에 들어 유독 ‘귀여움’의 힘이, 특히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있다. 첫 등장 당시 쥐에 가까웠던 미키마우스의 생김새는 시간이 흐를수록 아기 쥐에 가깝게 변했고, 세계적 성공을 거둔 일본의 헬로 키티는 1974년 처음 등장해 어른들의 세계에 천연덕스럽게 안착했다.
우울한 시대의 새 페르소나
여러 캐릭터 가운데서도 유난히 사랑 받는 캐릭터의 필요조건 같은 게 있을까. ‘공감이 가능한가’, ‘감정이입이 얼마나 깊이 될 수 있는가’ 등이 우선 조건으로 꼽힌다. 전 세계에 얼굴을 알리며 캐릭터 산업의 신화를 쓴 헬로 키티의 디자이너 야마구치 유코는 2009년 방한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좋은 캐릭터는 보고 있으면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고 또 나에게 말을 걸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캐릭터"라며 "대화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조금만 노력하면 손에 잡힐 것 같은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캐릭터와 사람 사이에도 교감이나 감정이입이 발생할 수 있으며 이 감정이 소비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1조원이 넘는 경제 효과로 지역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쿠마몬 역시 지진 피해자나 생존자, 혹은 이들을 위로하는 위로자의 모습과 겹쳐져 세계인의 응원과 사랑을 받았다. 지난 4월 구마모토 지진 직후 SNS에 “구마몬 괜찮니?”, “구마몬 힘내” 등의 문구가 가득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일 메신저 이용자들의 감정과 기분, 표정을 대신하는 메신저 캐릭터들의 경우 이런 감정이입이 극대화되는 매개체다. 라인프렌즈와 카카오프렌즈의 월 평균 이모티콘 발신 건수는 각각 720억, 20억 건이다. 글로 미처 다 표현하기 어려운 난처함, 욱하는 분노, 굽실굽실하는 태도 등을 표정과 행동으로 전해준다. 메신저 상에서 나를 대신하는 아바타이자 페르소나인 캐릭터들이 일상 전반에 스며드는 건 시간 문제인 셈이다.
키티의 성공을 분석한 ‘분홍빛 세계화’의 저자 크리스틴 야노 하와이대 인류학과 교수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귀엽고 사랑스럽고 편안하고 가족적인 무언가를 찾게 된다”고 설명한다. 테러, 여객선 침몰 등의 희생자를 위로하는 매개로 테디 베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세상이 암울해지면 어른들도 끌어안을 인형이나 애착인형이 필요해진다는 얘기다.
2016년 대한민국은 지진도, 테러도 아닌 어떤 위협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걸까. 최저임금 인상, 일자리, 집값 안정, 직장 괴롭힘이나 갑질에서 해방 등 숱한 ‘어른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지 않는 한 이런 ‘귀요미’들의 진격은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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