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 다녀왔다. 이육사의 ‘광야’를 두고, 만주 그 까마득한 벌판을 접해보지 않고서 어찌 이 시를 이해할 수 있겠냐는 평을 접한 지 삼십여 년 만에 드디어 만주와 대면하였다.
문득 우주조차 담길 만한 이 벌판을 경영했던 이들에 대한 경의가 솟구쳤다. 고구려와 발해, 한(漢)과 당(唐),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 몽골의 원과 만주의 청이 갈마들며 떠올랐다. 그 한구석에선, 그런 경험을 이어받지 못한 ‘지금 여기의 우리’ 모습이 연신 작아져 가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아예 없지만, 지금의 우리가 이 만주의 주인이 된다면 과연 이 광활한 대륙을 경영할 수 있을지….
만주 경영의 경험이 존경스런 까닭은 ‘우리도 대국이 돼야 한다’는 유의 팽창주의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그 가없는 벌판에 항상 존재해온 상이함을 품어내는 너른 품이 없으면, 절대로 그 넓은 만주를 통짜로 경영할 수 없다. 곧 만주 경영은 서로 다름이 공존하는 넓이를 고스란히 끌어안아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경의는 여기서 비롯된다. 몸집만 대국일 뿐 열려 있지도 않고 속 넓지도 않다면, 그 큰 덩치는 무엇에 갖다 쓰겠는가. 서로 다름을 끌어안는 넓이를 품어내느냐의 문제는 실제로 국가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기에 하는 말이다. 이는, 만주를 경영했던 이들이 동북아를 호령하는 수준을 넘어 중국과 중앙유라시아 일대에 명성을 떨쳤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철 지난 과거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와 같은 급으로 보는 중국은 만주 경영의 역사적 경험을 이어받았고 지금 그 엄청난 만주를 경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국의 발전전략을 세계전략 차원에서 설정해왔다. 한창 추진 중인 “일대일로(一帶一路)”란 국가전략만 봐도 그렇다. 이는 과거 동서 교류의 양대 젖줄인 비단길과 바닷길을 유기적으로 통합함으로써, 동남아시아, 중동, 중앙유라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중국을 기점으로 하나로 잇겠다는 초대 규모의 세계전략이기도 하다.
이를 그저 정치적 수사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최근 잇달아 보도됐듯이, 홍해와 아덴만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프리카 지부티에 내년이면 중국의 대규모 군사기지가 완공된다고 한다. 이를 필두로 동아프리카 해안부터 아랍, 인도양,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주요 길목에 군사기지나 그들이 운영하는 항만시설이 속속 들어서게 된다. 중국이 세계전략의 하나로 추진 중인 ‘진주목걸이 계획’이 현실로 전화되고 있음이다.
중국의 이러한 행보를 상찬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비판할 것은 당당히 비판하고, 경계할 바는 치열하게 경계해야 한다. 다만 그들의 이러한 국가전략 근저엔 만주 경영의 역사적 경험과 이를 현재화하는 정신이 깔려 있다는 점만큼은 놓쳐서는 안 된다. 게다가 서로 다름의 공존이 가능한 넓이를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21세기, 이 글로벌 시대의 문명 조건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에게도 만주 같은 광활한 벌판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 세계에 상존하는 다양함을 품어낼 수 있는 넓이를 창출하는, 그런 개방적이고도 다원적인 세계전략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세계전략이 왜 필요한지, 이는 중국엔 아시아가 없고, 일본도 스스로를 아시아에 가둬오지 않은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이 저 옛날부터 지금까지 왜 그러한 자세를 취해왔는지를 보면 된다. 우리는 동북아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을 중국은 동북지역이라고 한다. 중국의 동북쪽 일대라는 뜻이다. 하여 ‘동북아공정’이 아니라 ‘동북공정’이다. 일본은 고대부터 자신을 중화세계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근대 이후론 “탈아입구” 곧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의 일원이 된다는 목표를 현실화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줄곧 줄여오고 있다. 삼국통일로 줄어든 과거 역사를 말함이 아니다. 그건 당시로선 최적의 선택일 수 있었기에 그렇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얘기하자는 것이다. 교육현장에선 스스로의 상상력을, 또 실존 범위를 여전히 한반도에 가두고 있다. 정말로 작은 나라가 아님에도 자꾸 작은 나라라고 되뇐다. 그러더니 이젠 남한으로 국가 범위를 대놓고 축소시키고 있다. 소위 ‘건국절’ 소란 얘기다. 상해임시정부는 국토 없는 건국이기에 참된 건국이 아니라면서,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건국 시점으로 삼자는 그 주장 말이다. 결국 대한민국은 38선 이남만을 국토로 삼아 건국됐다고 우기는 셈이다.
하필 이웃한 나라가 죄다 세계전략을 국가전략으로 삼는 강대국인 바람에 가뜩이나 작아 보이는데,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더 좁혀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21세기 글로벌 사회에서 절대다수의 시민이 자유롭고도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면 문제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청년 10명 중 8명이 우리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한다. 세계는 언감생심, 자국 청년을 품어낼 넓이조차 지니지 못한 나라, 그런데도 갖은 ‘사회적 갑’들은 이 ‘헬조선’을 자랑스러워하라고 한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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