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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흔들면 흔들려라

입력
2016.08.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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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 세트 앞에서 어르신한테 망치로 또 얻어맞았다. 뭐? 흔들리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5, 6년 전 한 공립단체의 예술감독으로 갔을 때 여러분 앞에서 그랬다. 흔들지 마시라. 그러면 잘하겠노라. 아무도 흔들지 않았다. 그래서 내 딴에는 호사하며 한 시절 잘 살았다. 당연하지. 사람을 불러서 일을 시켰으면 흔들지 말아야지.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런데 내 삶의 모토와 대척점에 선 이 이상한 궤변은 무엇인가. 흔들면 흔들리라니.

언제인가 내 사주에 물이 많다는 말을 듣고 물처럼 살지 뭐, 했었다. 흐르는 물처럼. 좀 좋은가. 막히면 돌아가고 추워지면 얼고 봄 되면 풀리고 하면서 살자.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 물처럼 사는 것을 잊었다. 대나무 내지 통나무처럼 뻣뻣해졌다. 따져 묻고, 겉만 번지르르한 주의와 주장에 휩쓸리고 괜한 고집을 피워가며 있지도 않은 불의에 맞서 나만의 정의를 외쳤다. 누가 흔들면 불쾌해졌다. 나는 선장입니다. 선원들께서는 나의 방향키에 손을 대지 마세요. 이런 되지도 않는 교만이 내 마음 한구석에 없지 않아 있었다. 감히 내가 옳다고 믿었다. 물이 물이 아니었다.

흔들면 흔들려라. 이 말씀이 심장을 흔든다. 그렇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타고 살 일이다. 어깃장을 놓고 버텨봐야 내 몸만 고단해진다. 다친다. 흐름을 타야 산다. 그 안에 마법과도 같은 해답이 숨었다. 자연을 보시라. 이치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요 며칠만 봐도 놀랍다. 그 뜨겁던 뙤약볕과 열기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언제 여름이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가을로 바꿔 입었다. 고집불통이 아니다. 공전의 순리에 여지없이 타협하며 적응한다. 그래서 자연은 자연일까. 손바닥을 뒤집듯이 극과 극을 내왕하며 인생의 이치를 때때로 알려준다.

믿어왔던, 내지는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신념을 하루아침에 버린다면. 당연히 비난이 쏟아진다. 흔들리면 안 된다는 전제에서다. 하지만 흔들려도 된다는 전제라면 비난만 할 일은 아니다. 얼마든지 바꿔도 된다. 바꿀 수 있다. 절개를 지킨다는 것이, 의리를 지킨다는 것이 일견 근사하나 그 내막을 모르고는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유연하게 자기 내면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손바닥을 뒤집어 가며 살아도 뭐 괜찮다. 끝까지 가보면 믿었던 확신과 정반대의 논리도 꽤 괜찮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방황하면 정말 안 되나. 정녕 수다는 나쁘고 침묵은 금인가. 경청은 옳고 발언은 옳지 않은가. 우리는 이런 양 극단을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권리가 있다. 암만 생각해도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어떤 연출이 좋은 연출이냐고 누가 물었다. 당연히 능력 있는 연출이다. 그리고 능력이 없는 연출도 좋은 연출이다. 그게 내 대답이었다. 능력이 있으면 집단을 잘 이끌어갈 것이요, 능력이 없으면 그 집단의 여럿이 그 능력을 메울 동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경우. 이래저래 갈팡질팡할 확률이 높아서다. 하지만 내 대답은 틀렸다. 그도 좋은 연출이 될 수 있다. 주위에서 흔들 때 솔직하게 흔들리면 된다. 단, 끝까지 일관되게 흔들려야 한다. 그러면 저력이 생긴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연출 군에 속한다. 귀가 얇아서 너무 잘 휘둘린다. 공연 올리기 전까지 끊임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다급해져서 과반수로 정할 정도다. 그쯤 되면 연출 잘하는 거다. 솔직히 능력과는 별개다.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함께 잡아가려는 의지만 있다면 자못 훌륭하다. 이제 더 흔들려야겠다. 이십년을 더 사신 어른께서 흔들리라는데 흔들리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칼럼을 쓴 지 만 삼년. 그동안 확신하지 않아야 한다는 확신은 배웠다. 되지도 않는 글을, 참고 읽어주신 독자 제위와 실어주신 한국일보에 각별한 감사를 전한다.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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