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림
프레스에 눌려 납작하게 엎드린, 숫자와 문자들로 구워진 한 개인사는
당신의 그 물갈퀴 같은 손바닥을 타고 내게로 건너오기 전
당신의 가죽비린내 지갑 속에서
얼마나 흔들리고 터지고 싶었나요
당신이 허공으로 내다 걸 깃발
당신이라는 종이폭죽 말이에요
햇살 아래 반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와 당신의 교류는 순식간에 이번 한번이거나
조롱이거나, 서로에게 미쳐버리거나 할 수도 있을텐데
껌 씹는 문장들까지 나서서
어떻게 그렇게 삽시간에 건너왔을라구요
이런 생각, 당신의 그 찝찝한 착각 같은 종이인간 말이에요
시인소개
고희림은 1960년 원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라서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99년 문예지“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다. 대구경북작가회의 부회장, 시월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평화의 속도’, ‘인간의 문제’, ‘대가리’, ‘가창골 학살’ 등의 시집이 있다.
해설 김연창 시인
철학자는 거시적 관점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정치행위라고 한다.
명함이란 아주 내밀한 관계를 원할 땐 주고받지 않는 것이다.
연인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명함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명함은 그 안에 활자들처럼 딱 그만큼만 상대방에게 알려주기 위한
정치적 행위, 즉 비즈니스를 위한 장치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명함은 서로가 길들이기 위한 첫 단계일 뿐이겠다.
시인의 눈에 포착된 것은 명함의 표면이 아니라 내면이다.
웃는 얼굴로 종이와 활자를 주고받았지만
서로의 깊은 심상은 숨기고 웃고 있는 찝찝한 착각임을 예리하게 도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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