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촬영전 임시정부청사 방문
‘누가 되지 않는 작품 만들겠다’
영화사 대표 포부에 덜컥 겁나
의열단 리더 만나 겪게 되는
정출의 심리 변화가 8할
깊은 내면 연기에 “역시 송강호”
‘연기의 신’ ‘연기 괴물’이라는 호칭이 부여된, 국내 몇 안 되는 배우 중 한 명인 송강호(49)에게도 영화 ‘밀정’(9월7일 개봉)은 부담스러웠나 보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항일독립투사들의 활약을 담은 영화이니 그럴 만도 했다.
송강호는 중국 상해 촬영을 앞두고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찾아갔다. ‘밀정’의 제작, 배급사인 워너브라더스 코리아의 최재원 대표와 함께 가 3층짜리 좁고 자그마한 건물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들을 돌아보며 마음을 다졌다고 한다. 최 대표가 방명록에 남긴 글이 그를 “덜컥 겁이 나게”했다. 최 대표는 ‘누가되지 않는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글을 적어놨다. 천하의 송강호도 뜨끔해지고 숙연해지는 순간이었다. 29일 오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송강호는 “그 글을 보고 무언가 뿌듯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 데 갑자기 겁이 나더라. 나 스스로에게”라며 당혹스러웠던 당시를 회상했다.
송강호에게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예전에도 있었다. ‘YMCA야구단’(2002)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놈놈놈’?2008)에 출연했으나 ‘밀정’이 주는 중압감의 예전 작품들과는 크게 달랐다.
“배우로서 수 많은 시대 배경을 접하지만 ‘밀정’은 다른 작품에 비해서 마음 속에 차지하는 무게감이 달랐습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시대에 대한 경외감이랄까요. (최 대표가) 거창한 이야기를 적을 만큼 (나도)마음의 준비가 됐나 싶었죠. 시대가 주는 정의감 같은 게 (마음 속에서)올라오더라고요.”
‘밀정’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이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뒤를 쫓다가 의열단의 젊은 리더 김우진(공유)을 만나면서 겪는 인간적 고뇌를 제법 밀도 있게 그린 작품이다. 친일파를 척결하려는 의열단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2015)과 달리 사건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췄다. 친일과 항일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정출의 심리 변화가 영화의 8할을 차지한다. 얼굴이 클로즈업 될 때마다 느껴지는 송강호의 깊은 내면 연기는 “역시 송강호”라고 인정할 만하다. ‘조용한 가족’(1998)으로 시작해 ‘반칙왕’(2000)과 ‘놈놈놈’(2008)에 이어 ‘밀정’까지 18년에 걸쳐 4번이나 호흡을 맞춘 김지운 감독과의 ‘찰떡 궁합’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다.
영화는 인생의 페이소스와 블랙 유머를 품고 있다.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하는 정출에게서 묘하게도 웃음이 나올 때가 있다. 재치 있는 대사로 정출의 인간미를 부각시키는 대목도 있다. 예컨대 정출과 우진이 서로의 속내를 숨긴 채 가진 술자리에서 우진이 “형님은 (친일에 앞장서는)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입 바른 소리를 하자, 정출이 “아이고 쳐드시게”라고 받아 칠 때 관객들은 쓴웃음을 짓게 된다. 하지만 송강호는 “촬영 때나 편집할 때 더 재미있게 유머 포인트를 줄 수 있었지만 굉장히 절제했다”고 했다. 캐릭터에 손실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송강호는 ‘밀정’이 김 감독의 ‘절제미’를 드러낸 영화라고도 했다. 예전 작품에선 김 감독만의 장르적인 변주와 작가로서의 면모, 연출가로서의 야심 등이 잘 녹아있지만 ‘밀정’에선 그런 특징들을 자제했다는 거다. 송강호는 “(김 감독의 그런 면에)수긍이 갔다”며 “연출자로서의 야심을 드러내기 보다는 시대적 서사나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가 더 진지하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인물의 심리 변화에 집중하니 2시간 20분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가 관객에게는 다소 긴 여행처럼 느껴질 수도. 송강호는 이를 김 감독의 열정으로 해석했다. “많은 얘기를 담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정서를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바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제가 출연했던 ‘밀양’도 상영시간이 2시간이 넘는 데, 그때 제가 (‘밀양’을)사골국물에 비유를 했어요. 빨리 먹고 싶어서 대충 끓여 먹으면 사골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없잖아요.”
최근 그는 웃음기를 빼고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한 발 더 다가가는 영화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당시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2013)과 ‘밀정’, 내년 개봉 예정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담은 ‘택시운전사’ 등이 최근 그의 행보의 방향을 가늠케 한다. 작품을 고르는 데 있어 어떤 변화가 있는 것일까. 송강호는 “정치적인 인물이나 실존인물에 대한 강박이 있는 건 아니다”며 “평소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라 분명히 마음이 가는 것이고 다른 이유로 그런 작품들에 출연하는 건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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