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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취한 말들의 시간

입력
2016.08.2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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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술 좀 마시지 마요. 그건 그냥 견디는 거잖아요.”

휴대폰 액정화면에 늘어서 있는 글자들을 보는 순간, 흐릿하게 무뎌진 머릿속에서 형광등 하나가 반짝 켜지는 것 같았다. 네가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메시지였다.

너는 끝내 지난밤 술자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술 마시기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번갈아 너를 향해 통화 버튼을 누르거나 글자들을 찍어 보내며, 네 안부를 묻고 근황을 확인했다. 초대와 설득, 회유와 협박을 거듭했다. 어느새 너는 가장 인기 있는 존재로 떠올랐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핑계가 되었다. 우리는 너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였고, 안주를 집어 먹었고, 술기운에 들떠 취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말들이 있는 것처럼,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술을 마셨다. 설마 우리가 너보다 잘났다는 말을 듣지 못해서, 너에게 무시를 당해서, 자존심이 땅에 떨어져서, 기껏해야 더 많은 연봉을 받지 못해서, 더 비싼 자동차를 사지 못해서, 제 뜻대로 살 수 없어서 술을 마셨을 리는 없다. 네가 오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인생이라는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아다니며 늙어가게 하고 마침내 저승으로 이끄네….” 트럭 짐칸에 올라탄 아이들이 목청껏 부르는 노래로 시작되는 영화가 있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아버지가 이란과 이라크의 국경에서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자, 열두 살 쿠르드족 소년은 가장이 된다. 누나는 노새 한 마리에 팔려가고, 소년은 불치병에 걸린 형의 목숨을 고작 몇 달쯤 연장하기 위해, 어린 누이동생에게 연필과 공책을 마련해주기 위해, 아버지의 동업자들이었던 밀수꾼들과 합류한다. 국경을 넘어가 노새를 팔아 돈을 마련한 다음, 형을 데리고 병원에 가기로 결심한다. 출발하기 직전 밀수꾼들은 노새에게 보드카를 먹인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짐을 잔뜩 진 노새를 움직이게 하려면 취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으므로. 소년은 왜소증에 걸린 형을 품에 안고, 취한 노새를 끌고, 험한 산길을 오른다. 소년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이나 국경수비대만은 아니다. 무장을 한 산적들에게 쫓겨 밀수꾼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자, 소년도 안간힘을 쓰며 달아난다. 그러나 술에 취한 노새는 얼마 걷지도 못한 채 눈길에 쓰러져 버린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막막한 하얀 빛 속에서 소년은 울부짖는다. 더 좋은 운동화를 갖고 싶어서도 아니고, 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서도 아니고, 자아실현이 이루어질 빛나는 미래를 위해서도 아니다. 술에 취한 노새가 얼어 죽을까 봐, 산적들의 눈에 띄어 총에 맞게 될까 봐, 소년은 노새에게 인제 그만 일어나라고 소리친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운명인 형에게 딱 한 번 수술이라도 받게 해주고 싶어서.

네가 오지 않는 동안, 우리는 취한 말들을 나누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아니 숨어 있을지도 모를, 없는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랑이나 우정을, 혹은 그것을 대신할 무엇인가를 찾으려 애썼다. 취한 말들은 하면 할수록 닳아버렸다. 진심을 말하고자 술을 마셨지만, 술을 마시자 진심은 사라져버렸다. 누군가 억울하다 해도 내 것을 내던지며 싸울 것도 아니면서, 누군가 배고프다 해도 내 것을 내주며 도울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잠시 의기투합하여 생을 긍정해 보려 했고, 센티멘털리즘이 뿌려진 달달한 위로를 맛보려 했다. 네 말대로 우리는 그냥 그렇게 견디고 있었다. 취해서 눈밭에 쓰러진 노새처럼, 뭘 견뎌야 하는지도 왜 견뎌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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