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되는 사건만 맡아 생활고
포털사이트 통해 후원금 밀물
시민 9000명이 3억원 보내와
“뜻있는 변호사들과 재단 만들어
형사사법피해자들 적극 도울 것”
한낮 최고기온 36도. 사상 최고 폭염이 이어지던 지난 22일 낮 경기 수원의 한 사무실. 박준영(43) 변호사가 낡은 선풍기에 의지한 채 사건 조서를 들춰보고 있었다. 부산에서 살인사건에 연루돼 21년을 감옥에서 살고 나와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한 남성의 기록이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모자를 눌러쓰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서류를 살피는 그의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그가 또 맡게 될 재심사건의 하나일까?
‘재심’ 전문 공익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박 변호사가 생활고에 빠졌다고 해 주목 받고 있다. 그는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돈이 없어 사무실을 뺀다”는 글을 올렸다. 돈과 명예를 누리며 풍족한 삶을 살 것만 같은 변호사가 파산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익산 택시기사 살해사건 ▦무기수 김신혜 사건 등 소위 ‘돈 안 되는’ 사건만 맡아온 때문이다.
현재 그에게 남은 건 월세 55만 원짜리 아파트 보증금 3,000만원이 전부다. 사무실 보증금 2,000만원은 월 임대료 165만원이 10개월 가까이 밀려 거의 바닥났다. 리스로 쓰던 에어컨, 복사기, 팩스, 정수기 등은 반납한지 오래다. 무료변론 등을 하며 끌어다 쓴 은행 빚은 3억 원으로 불었다. “자초한 일이고 결국 이리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참으로 냉혹했다.”
더위에 시든 것처럼 의욕을 잃어가던 박 변호사에게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그가 지난 11일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후원금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고 28일 현재 9,000여 명이 건넨 성금이 3억 원 넘게 모였다. 잇단 법조비리로 사법계의 신뢰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이때, 의로운 변호사를 돈 없고 힘 없고 백 없는 서민들이 살린 것이다. 박 변호사는 “사법불신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해결해야 한다는 국민의 뜻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의 사연을 사무실에서 만나 들었다.
-국민의 후원과 응원이 대단하다.
“요즘 하루 2~3시간밖에 잠을 잘 수가 없다. 경험해보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당황스럽다. 국민들의 격려에 대한 흥분, 앞날에 대한 설렘, 앞으로 삶에 대한 고민 등이 크다.”
-돈과 명예를 탐하다 추락하는 변호사들이 판친다. 국민들은 그들과 다른 박 변호사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니겠는가?
“건방지거나 겸손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수석으로 고시를 패스하고 연수원 1, 2등으로 졸업했다면 나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제게도 섬뜩하리만큼 놀라운 악성이 느껴질 때가 문뜩문뜩 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안타까움, 비판은 다른 분들과 다르지 않다.”
-법조인들의 비리,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냉정하게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사실 우리 사회는 직업적 양심이나 윤리에 대한 설정이 제대로 안 돼 있다. 내 능력과 내 가족의 도움으로, 내가 잘나서 사법고시를 패스했다고 생각하면 자기와 자기 가족 이외에 우리 사회는 보이지 않게 된다. 이럴 때 비도덕적인 주관적 양심을 사회 전반의 객관적 양심이 보완해야 한다. 주관적 양심이 문제점을 보일 때는 객관적 양심과 원칙으로 단죄해야 한다.”
-변호사는 어떻게 됐나?
“시골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사실 어머니는 중학교 2학년이던 1988년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재혼했다. 방황했고 가출도 많이 했다. 술 먹고 때리는 아버지가 싫어 집을 뛰쳐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어릴 적 내 손을 잡고 ‘아들은 크게 될 인물’이라고 격려해주시던 생전 어머니의 말씀이 나를 붙들었다.
지방대에 간신히 들어가 군대에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고시를 준비하던 선임을 만났다. 고시만 된다면 인생이 달라질 것 같았다. 돈도 벌고 유명해 진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전역한 뒤 대학을 때려 치고 선임을 따라 신림동에 들어갔고, 5년 만에 고시에 합격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다시 이 세계에서 비주류가 돼 있었다. 받아주는 곳이 없어 수원의 선배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고 건당 20만~30만원인 국선변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 2008년 1월 ‘수원노숙소녀사건’을 운명처럼 만났고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의 사연을 직접 경험했다.”
-재심사건 등에 눈을 뜬 직접적인 계기가 있나?
“합격커트라인보다 단 1점 더 받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1점차로 떨어진 사람과 내가 다를 바가 뭐가 있나. 난 행운이 있는 사람이다. 그 행운을 준 우리 사회에 보답하려 하는 것뿐이다. 어려운 과정을 알기에 사회적 약자의 억울한 사연에 눈길이 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국민들의 물질적인 지지와 응원을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공인’이 됐다.
“내가 그 동안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삶을 살아 왔는지 두렵고 떨린다. 나의 선택과 판단이 잘못됐을 때 쏟아질 비난과 비판의 무게도 이전보다는 훨씬 더 무거울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잘못된 판단을 내린 국가공권력에 맞서는 일이어서 무섭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돈까지 받아놓고 피한다면 미친 놈 되는 거 아니겠나.”
-국민의 성원은 어디에 쓸 생각인가?
“일단 빚을 좀 갚고….(웃음) 국민들이 저를 살려준 의미대로 제대로 한 번 살아보고 싶다. 제 사연이나 하는 일 등이 알려지면서 정말 많은 분들이 개인적으로 연락해 도움을 요청한다.(사실 인터뷰 중에도 2,3분에 한번 꼴로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열심히 뛰겠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면.
“뜻있는 변호사들과 의견을 모아 공익법인이나 재단을 만들어 형사사법피해를 당한 국민들을 위해 활동할 생각이다. 사법부 처벌을 받지 않은 권력층으로 인해 피해를 본 국민들도 적극 돕겠다.”
글ㆍ사진 유명식 기자 gij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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