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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운동회 날의 고독

입력
2016.08.2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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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도 나는 수도권에 소재한 초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7,000명가량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그래서 가을 운동회 날이면 청백의 모자를 쓴 7,000명이 운동장에서 바글거리는 장관이 펼쳐지곤 했다.

그리고 내겐 운동회 날 유독 뇌리에 남는 사람이 있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의 눈으로 봐도 추레한 행색의 아저씨였다. 땀에 찌들고 더러운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고, 볕에 검게 타고 주름이 자글거리는 얼굴이었다. 손에는 크고 때 묻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그 폼이 익숙해 아저씨의 직업이 평소에도 이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일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길이나 지방의 축제를 돌아다니면서 잡다한 먹거리를 파는 행상이었을 것이다.

하나 그는 차려입은 젊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의 차림새는 그저 흔한 행상이었기 때문에, 추레한 행색 때문에 돋보인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있었으면 그가 학부모인지 행상인지도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직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교문 앞에서 큰소리를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학년 8반 김민철이 아빠다. 1학년 8반만 아이스크림을 나눠준다. 1학년 8반.”

그는 학부모였다. 하지만 민철이는 아빠가 부끄러웠던지 곁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만여 명의 혼돈 속에서 그 아빠의 외침은 유난히 선명히 들렸다. ‘아이스크림, 나눠준다.’

아이스크림이라면 맥을 못 추는 영악한 아이들이 저 말을 듣고 어떻게 했겠는가. 1학년 7반인지 9반인지 알 순 없지만 도저히 8반으로는 안 보이는 아이들은 그 앞에 달려가 자신의 소속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저 8반 민철이 친구예요. 아이스크림 주세요.” “저도요 저도.”

분명 같은 반 친구들을 본 적이 없었을 아저씨는 놀라운 비율로 몰려든 아이들에 잠깐 당혹스러운 기색을 지었다. 그리곤 어쩔 수 없었는지, 아니면 아이들을 믿었는지 실제로 아이스크림을 7,000명의 틈바구니에서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애초에 7,000명이 우글대는 운동장에서 민철이 친구 50명을 찾아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가며 약간 녹은 아이스크림을 순순히 건네고 있었다. 하긴 그 상황에서 아이들을 하나하나 취조해가며 나누어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어수룩한 광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첫 운동회를 맞이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느라 그간 아이에게 해준 것이 없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학교에 가서 아이의 체면을 세워주고 싶었다. 비록 직업은 행상일지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민철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면 민철이가 인기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행상을 매고 운동회가 열리는 학교로 왔지만, 운동장이 번잡해 아들은 찾을 길이 없다. 결국 그는 그날 팔아서 돈을 만들어야 하는 피 같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7,000명의 아이 앞에 서서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걸 누군지도 모르는, 혹여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건네주고 있을 때, 아저씨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깝다는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자기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었을까. 그것은 결국 자기 위안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아이를 사랑하기에 꼭 해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벌써 25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가끔 아저씨가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던 것들을 생각해 본다. 사랑을 순수하게 박살 내던 영악한 아이들과 알면서도 꼭 아들을 배반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피 같은 아이스크림을 건네던 그 고단한 삶까지도. 그래서 이런 날이면 나는 꼭 뙤약볕 아래서 7,000명의 개미 떼 같은 아이들 앞에 선 행상 아빠의 고독이나 절박함 같은 것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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