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이달 초 생전퇴위 의사를 밝히면서 그의 평화주의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군사적 보통국가론’이 명확히 대비되고 있다. 현재의 일왕은 한국인과 악연인 부친 히로히토(裕仁)와 달리 시종일관 평화주의자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해석될 발언을 삼가해왔지만 필요한 경우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대지진 현장에 달려가 무릎 꿇고 위로의 말을 건네거나, 비가 쏟아져도 우산을 받치지 않은 채 머리숙여 묵도하는 모습은 그가 왜 일본국민 통합의 존재인지 실감하게 만든다.
구시대의 유물일 수 있는 왕실의 위상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일본은 반대로 국민적 존경과 권위가 올라가고 있다. 그만큼 처신을 잘하기 때문일 것이다. 건강이 예전같지 않아 공무에 지장을 초래하는 결례를 범하기 싫다는 뉘앙스 자체가 소탈한 인간적 풍모를 느끼게 한다.
일왕의 충격선언이 아베의 평화헌법 개정 구상에 장애물이 될지 오히려 디딤돌이 될지 일본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자민당의 개헌초안엔 전체주의, 내셔널리즘 강화의 색채가 뚜렷하다. 때문에 퇴위의사를 밝히면서 ‘상징’에 그치는 일왕의 지위를 강조한 점이 아베 집권세력이 추구하는 개헌내용을 비판한 것이란 해석이 나오지만, 퇴위의 절차적 근거마련을 위해 헌법수정 필요성이 제기됨으로써 개헌물꼬를 터줄 것이란 평가도 있다.
최근 일본인 지인에게 일왕 퇴위에 대한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군국주의 망령을 반성한다며 일왕의 행보를 자랑하던 지인은 정작 헌법을 고쳐 자위대를 정식군대로 바꾸려는 아베에 대해서도 일본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폈다.
일본인의 이중성은 일왕의 평화주의가 실질적으로 일본 사회를 바꿀 수 없다는 점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10여년전 학교에서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제창하도록 법을 바꾼 데 대해 “강제로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언급해 파장이 일었지만 이후 바뀐 것은 없었다. 오히려 최근 도쿄올림픽 조직위원장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가 리우올림픽 출전 격려행사에서 기미가요를 큰 소리로 부르지 못하면 일본 대표선수가 아니라고 훈계했을 뿐이다.
긴박하게 치닫는 동북아로 시야를 넓히면 일왕의 평화주의는 더욱 귀에 들리지 않는다. 일본인이 TV를 틀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 주변에 진입한 중국 함선들의 위협을 안방에서 느낄 수 있다. 시진핑 정권이 남중국해 해양진출에 대한 국제재판에서 패배하자 내부비판을 돌파하기 위해 이 지역의 긴장을 유발한다는 분석이 주류다. 이에 아베 정권도 극우내각을 발족시켜 맞불을 놓고 있다. 지금 일본에선 중국의 위협을 감안한다면 평화 운운하는 목소리는 위선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이번주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회담은 한국의 지정학적 현실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한국인에게 국제정세의 이해는 필수과목이다. 당장은 한중관계보다 위안부 후속조치 진행으로 한일이 밀착하는 형국이다. 일본은 중국에게 국제규범을 수용하라는 압박을 강화할 것이다. 그러나 고비를 맞을 때마다 중국은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아베 우익내각을 공격할 것이고 그때마다 한국의 입장은 휘둘릴 수 있다.
일본 보수진영은 내달 항저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나 하반기 한중일 정상회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더라도 일시적 화해국면이 지난뒤 센카쿠를 둘러싼 중일간 충돌은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만약 센카쿠에서 소규모 국지전이라도 벌어진다면 지는 쪽은 정권이 붕괴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 아랫목에서 중일간 무력충돌이 현실화되는 것은 분명 악몽이다. 이 와중에 안보문제로 내부 국론분열에 빠져 세월을 허송하긴 너무도 한가한 것 아닌가.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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