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엘리트 고교생 가르치는 교사
장난 글 의심않는 학생들에 충격
‘미디어 리터러시’ 매뉴얼 제시
학술 논문ㆍ뉴스ㆍ광고부터
음모론과 정치인 수사까지
자료 읽는 비판적 독법 풀어내
너희 정말, 아무 말이나 다 믿는구나
소피 마제 지음ㆍ배유선 옮김
뿌리와이파리 발행ㆍ284쪽ㆍ1만5,000원
일단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자. 프랑스 대입 자격 논술시험 ‘바칼로레아’는 그 자체가 너무나 재수없는 ‘엄마 친구 아들’같은 존재다.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같은, 인터넷에 떠도는 기출 문제를 보고 있노라면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죄다 칸트에 헤겔에 아인슈타인 같다. 영어 단어, 수학 공식 몇 개에 목매는 우리 처지가 너무 초라해 뵌다.
그런데 바로 그 프랑스에서 나왔다는 책이 ‘너희 정말, 아무 말이나 다 믿는구나!’다. 더구나 고등학교에서 영어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저자 소피 마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그냥 학생들이 아니라, 프랑스의 엘리트를 길러낸다는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이다.
저자는 어느 날 수업자료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준비했다. 물론 코믹한 장난을 넣은 글이었다. 늘 통합의 가치를 웅변하는 오바마의 연설에다 배제의 언어를 집어 넣은 것이다. 교묘한 것도 아니고 누가 봐도 티 날 정도로 어이없는 얘기를 넣었는데도, 30여명의 아이들은 의심하거나 곤혹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진지하게 읽어내려 가는데 집중했다.
우리에겐 ‘그래, 바칼로레아 풀어대는 너희들 역시 칸트도 헤겔도 아인슈타인도 아닌, 그냥 질풍노도 고딩들이었을 뿐이야’라는 잔잔한 위안을 주는 참 고마운 사례건만, 저자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해서 준비한 게 ‘지적인 자기방어 수업’이다. 주어진 정보와 자료를 별 의심 없이, 합리적 추론 작업 없이 있는 그대로 덥석덥석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우기 위한 수업이었다. 이 책은 2011년부터 진행한 그 수업 자료를 바탕으로 썼고, 해서 책의 원제도 ‘지적 방어를 위한 매뉴얼’이다.
짐작하다시피 그래서 이 책은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에 대한 얘기다. 미디어라 해서 신문, 방송만 말하는 건 아니다. 교과서, 교재, 광고물, 학술연구논문 등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로 하는 모든 자료가 다 미디어다. 이 자료들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 하는, 문해력에 대한 얘기다.
이게 정말 필요한 이유는 지금 시대가 인터넷, SNS로 인한 미디어 대폭발 시대여서다. 별다른 미디어가 없던 시절에야 신문 한 구석에 실린 1단짜리 기사 하나 읽고선 “신문에서 봤다니깐!” 하고 우기면 다 통했다. 그러나 이젠 지겨울 정도로 미디어가 많아졌다. 클릭만 하면 정보가 쏟아진다. 대체 이걸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시대다.
가장 신뢰할 만하다는 전통 미디어부터 그렇다. 신문에 칼럼 쓰고 TV 토론회에 나오는 ‘전문가’를 다 믿어선 안 된다. 언론에 등장하는 전문가들이란, ‘맛집’과 비슷하다. 정말 그 분야에 정통한 인물들은 거의 드물고, 대개는 미디어 쪽에서 연락했을 때 잘 연결되고 적당히 감각적인 반응을 잘 내놓는 인물들이다. 어떤 사안이나 사건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일반인들 역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 가운데 인터뷰를 수락한 사람”일 뿐이다.
더구나 뉴스는 피아를 구분하는 방식으로, 또 수용자들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 편승해 제작된다. 쉽게 말해 삶의 회색지대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극단론에 치우치는 경향이 크다는 건데, 알다시피 삶의 99%는 회색지대다. ‘멍청하고 기괴한 너희들은 그딴 식으로 살고 있지만, 현명하고 우아한 나는 안 그래’라는 틀은 뉴스 제작자, 수용자 모두 알게 모르게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틀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난 아니고, 넌 그래’라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그런 생각을 ‘모두가’ 한다는 데 있다. 해서 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팔아먹기 위한 정보 가공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건 공급자의 변명이 아니라 수요자의 요구이기도 하다. 공급자도 어느 정도 양식 있는 수준에서 멈춰야 하지만, 수요자도 적당한 수준에서 이를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요점이다.
수요자의 본성과 관련해 저자는 미국 유선케이블 회사의 재미난 사례를 들었다. 이 회사는 만성 체납자에게 돈 받아내려고 프로그램 공급 중단 등 갖은 조치를 다 해봤는데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 다 해결했다. 무슨 방법일까. 바칼로레아 문제라 생각하고 한껏 궁리해보시라. 정답 확인은 기사 맨 끝에.
저자는 이런 방식으로 최초로 흑인 대통령 데이비드 팔머를 등장시킨 미국 정치 드라마 ‘24’, 9ㆍ11 테러나 샤를리 에브도 테러 같은 대형 사건 뒤에 늘 따라붙은 갖은 음모론,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등 건강과 의학 등을 둘러싼 현대 과학에 대한 절대적 불신론, 유전자변형작물(GMO)에 대한 환경단체들의 공격, ‘국민’이나 ‘국익’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인들의 전형적 수사 등에 대한 비판과 분석을 진행해 나간다.
최근 논란이 되는 ‘부르키니’(부르카+비키니ㆍ이슬람여성들이 입는 온 몸을 다 가린 수영복)를 떠올리게 하는 ‘부르카착용금지법’에 대한 얘기도 있다. 저자는 ‘공화국 헌법’의 이상을 내세워 프랑스의 입장을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 논쟁에 관심 있다면 찬반을 떠나 한번 읽어볼 만하다.
저자는 ‘지적인 자기방어 수업’으로 지난해 프랑스 정부가 주는 교육공로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어쩌면 프랑스가 창의적인 건 고등학생들이 그 어렵다는 바칼로레아 문제를 풀어서가 아니라, 이런 수업을 개발하고 진행하는 교사에게 프랑스 정부가 훈장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고생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문제는 요즘 국내에서도 그 필요성이 제기된다.
아, 미국 유선케이블 사업자의 체납요금 징수 방법은 이거였다. 모든 채널을 국회의원 연설 생중계 방송으로 전환하기.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공론장을 형성하는데 크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이토록 공익적이고 공공적인 방법을 쓰자마자 체납자들은 ‘제발 다른 프로그램 좀 틀어달라’며 밀린 요금을 다 냈단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아니 그런 존재이기도 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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