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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에어컨 없이 견디게 만드는 너

입력
2016.08.2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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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지키는 사람이 있고,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다. 나는 어느 쪽이 될 것인가. 올여름의 폭염이 다시 이 질문을 내게 던지고 있다. 운이 좋아 이 행성의 아름다움과 마주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지켜주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생겨 자동차나 에어컨을 사지 않고, 고기는 최소한으로 먹으며 살아왔다. 그 결심이 여름 내내 흔들렸다. 한낮의 더위야 카페로 피신해 버텼지만 열대야가 한 달씩 이어지니 잠을 못 자 죽을 지경이었다. 에어컨 있는 동생네 집으로 피서를 갔던 밤, 에어컨을 사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올케와 나누고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조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고모는 북극곰을 지켜준다고 에어컨 안 산댔잖아. 우리 집은 매일 북극곰을 죽이는데.” 북극곰을 지키려다가 고모가 먼저 죽을 것 같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꾹 눌렀다. “그렇지, 고모라도 에어컨 안 사야겠지, 더 버텨볼게”라고 답하고 말았다. 어쨌든 올여름은 지나갔으니까. 비겁한 계산은 속으로 삼켰다.

새 책의 원고를 넘긴 어제, 제주에 내려왔다. 이 섬에 살았던 후배가 최근 떠오르는 곳이라며 청수리의 반딧불이 관람을 추천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는 삼척의 무릉계곡 근처라 산이 깊고 물이 맑았다. 여름이 되면 꼬리에서 노란 불빛을 쏘아 올리는 반딧불이가 지천으로 날아다녔다. 나는 반딧불이를 잡아 덜 핀 호박꽃 안에 넣어 꽃등을 만들어 놀곤 했다. 호박꽃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반딧불이의 불빛은 어린 나를 매혹시켰다. 그 불빛에 기대어 책을 읽는 될성부른 떡잎은 되지 못했지만 호박등은 내 좋은 장난감이었다. 질릴 때까지 놀다가 슬쩍 꽃잎을 벌려주면 반딧불이는 해코지도 하지 않고 날아가곤 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청수 곶자왈을 찾아갔다. 저녁 8시, 약속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놀랍게도 내가 최고령이었다. 대부분 20대와 30대 초반의 연인들, 혹은 아이와 함께 온 젊은 부부들이었다. 반딧불이 관람을 이끄는 분은 이 마을의 평화박물관을 만든 이영근 관장님. 반딧불이에 관한 간단한 소개와 주의사항을 듣고 난 후 관장님과 함께 걸었다. 어두워져 가는 하늘에 별들이 떠올랐고, 숲에서 싱그러운 풀 내음이 날아왔다. 여름의 끝이 아쉽다는 듯 풀벌레들이 울고 있었다. 불빛이 없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가끔 반딧불이가 날아왔다. 그러면 우리는 발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침묵 속에서 반딧불이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반딧불이가 우리 주변을 맴돌다 멀리 날아가면 일어나 걸으며 다시 반딧불이를 기다렸다. 그렇게 걷고, 멈추고, 앉고, 일어나 걷는 내내 우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아이들마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핸드폰을 켜거나 사진을 찍는 이도 없었다.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반딧불이의 비행을 보겠다고 기다리던 그 순간.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존재였다. 기다림의 가치를 알고, 작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사라져가는 것들의 슬픔을 아는 이들이었다. 어떤 따뜻한 연대감이 반딧불이와 우리 사이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토록 근사한 경험이 가능한 건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한 사람의 사랑 덕분이었다. 사비를 들여 반딧불이에 관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여름 내내 관람을 이끌고, 연못을 파 반딧불이의 먹이 다슬기를 키우는 집요한 애정. 게다가 돈 한 푼 받지 않는 통 큰 사랑의 주인공이 이영근 관장님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살게끔 하는 것’이라고(愛之欲其生) 했다. 무언가를 지키는 이들은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이들이다. 지구가 이만큼이라도 나아질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번 여름의 폭염 때문에 반딧불이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북극곰 말고도 에어컨을 사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겨났다.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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