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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입력
2016.08.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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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오늘은 전태일의 예순여덟번 째 생일이다. 자료사진
오늘은 전태일의 예순여덟번 째 생일이다. 자료사진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분신하지 않았다면, 그는 오늘 68세 생일을 맞이했을 것이다. 만일 그의 정당한 요구를 귀담아 들어준 공무원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더불어 싸워줄 노동법 전문가나 단체가 있었다면, 국회가 만든 근로기준법을, 앞서 국가가 인간의 존엄을 천명한 헌법을 존중하는 흉내라도 냈다면, 그는 분신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고두고 속고 속고 또 속으면서도, 어쩌면 거기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그에겐 자기만 쳐다보는 자기보다 더 약한 노동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집이 어려워 학교는 초등학교도 다니다 말다 해야 했고, 열 살도 안 돼 아버지에게 재봉 기술을 배우고, 이런저런 행상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학교를 가다가 아버지에게 맞은 적도 있었다. 16세에 가출, 서울 청계천에서 봉제 시다 생활을 시작한 것도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하루 14시간씩 일하고 받은 일당이 차 한 잔 값이던 50원이었다. 하루 방값이 120원이던 시절, 부족한 방값을 벌기 위해 새벽마다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았다. 그러면서 책을 사서 독학했다.

66년 여름 그는 해고를 당했다. 과한 노동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폐렴에 걸려 해고 당하는 어린 여공을 도우려다가 밉보인 탓이었다. 68년 근로기준법이란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진학보다 법 공부를 앞세웠다. 법이 있으니 법을 배워서 말하면,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은 사장과 달리 들어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는 청계천의 노동 여건과 법 위반사례를 조사하고, 밤잠 줄여 근로기준법 관련 조항을 암기했다. 하지만 시청 근로감독관도 노동청 담당자도 사업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를 조롱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에게도 탄원서를 썼다. 하루 14시간 작업시간을 10~12시간으로 줄이고, 일요일은 쉴 수 있게 해달라는 게 그가 탄원한 내용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목표 달성에 혈안이 돼 있었다.

그는 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만들었고, 야학 교사로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쳤다. 그런 그를 조롱하던 이들도 있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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