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한 가족이 당신의 이름으로 120억원대 유산을 남겼습니다.”
부산에 사는 러시아 동포 김모(32)씨는 지난 3월 이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반신반의했지만 그 다음 수신메일에 숨진 친척의 이름으로 ‘김 올레그’라는 러시아식 성명을 보고 상속 비용 한화 140만원 상당을 송금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120억원대 유산상속을 미끼로 이메일을 통해 접근, 변호사비와 공증비 등의 명목으로 9,700만원 상당을 받아 챙긴 미국인 모녀 2명이 경찰에 구속됐다. 이들은 김씨를 믿게 하려고 최근 국내에 직접 입국했다가 덜미가 잡혔다.
부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25일 사기 혐의로 미국인 모녀 M(67)씨와 O(46)씨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무작위로 이메일을 발송하는 국제사기단의 수금책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유산상속을 빌미로 김씨로부터 올해 3월 16일부터 지난 8일까지 16차례에 걸쳐 9,700만원 상당을 송금 또는 직접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조사결과 김씨는 매번 적게는 26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원 정도를 송금했다. 러시아 동포인 김씨는 결혼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해 부산에 있는 모친과 함께 살고 있었다. 김씨는 9,7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모친의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기도 했다.
미국인 M씨 모녀는 지난 7일 입국했다. 국제사기단은 김씨에게 “거액이라 바로 인출이 안되니 기업투자명목으로 인출해야 한다”며 “공증을 위해 대리인을 보내겠다”고 속였다. 입국한 M씨 모녀는 김씨에게 투자계약서에 대한 미영사관 공증비 명목으로 920만원을 받아 챙겼다.
그 동안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던 김씨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부산 미영사관으로 달려갔다. 공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미영사관 측에서는 “이런 서류에는 공증을 해주지 않는다”고 답했고 김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M씨 모녀의 출국 3시간 전인 지난 10일 오전 호텔 앞에서 이들을 검거했다.
경찰은 이들 모녀가 지금까지 총 4차례 입국한 기록을 확보하고 집중 추궁했고 이들은 “다른 피해자에게 지난해 12월에도 7,500달러를 건네 받는 등 총 5억원 상당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관련 피해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시민들의 주의와 신고를 당부했다.
김병수 부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장은 “수백억의 유산상속금이나 기업투자금 명목으로 대규모 메일을 발송하는 일종의 보이스피싱 형태 범죄다”며 “외국 공관에서는 이 같은 계약서에 대한 공증을 하지 않으며, 통상 여권분실 확인 등 간단한 사안만 확인해준다”고 말했다.
경찰은 국제공조를 통해 아프리카와 미국 등에서 은행직원과 변호사 등을 사칭한 국제사기단 일당에 대한 수사를 계속할 예정이다. 부산=정치섭 기자 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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