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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침묵의 제스처

입력
2016.08.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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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올림픽 마라톤 은메달리스트인 페이사 릴레사가 폐막 후에도 자기나라 에티오피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세리머니 때문이다. 릴레사는 결승선에서 양손을 들어 X자를 그었고, 메달 시상대에서도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정부가 우리 국민을 죽이고 있다”고 했다. X자는 ‘스톱 사인’인 셈이다. 인종 갈등 성격이 짙은 오로미아 시위를 정부가 폭력 진압하는 과정에 1,000여명의 사상자가 생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로미아는 릴레사의 고향이다. 릴레사는 “에티오피아로 돌아간다면 죽거나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며 귀국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다. 은메달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 올림픽 참가선수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은 드문드문 있었다. 가장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남자 200m 메달리스트의 세리머니다. 세계기록을 세운 금메달리스트 미국의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시상대에서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을 연상시키는 표정이다. 그들의 가슴에는 ‘OPHR’배지가 달려 있었다. ‘인권을 위한 올림픽 프로젝트’의 약자다. 두 흑인 선수의 세리머니는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선수촌에서 쫓겨났으며 귀국 후 국가대표 자격도 박탈됐다.

▦ 우리도 그 대열에서 빠지지 않는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3, 4위전에서 일본을 2-0으로 꺾은 뒤 박종우는 관중석으로 달려가 기뻐하다 관중이 건네준 ‘독도는 우리땅’종이를 들고 세리머니를 하다 동메달 수상이 보류됐다. 박종우는 IOC의 지시로 시상대에 오르지도 못했다. 오랜 진상조사에서 우발적 상황임이 참작돼 6개월 뒤 IOC의 경고만 받고 다행히 동메달을 되찾았다.

▦ 올림픽 헌장 50조 3항은 어떤 시위나 정치, 종교, 인종적 선전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IOC의 징벌도 이를 근거로 한다. 올림픽 무대라고 해서 정당한 의사 표현을 금지할 이유가 있느냐는 입장이 있지만, 세계인이 주목하는 무대에서 너도나도 피케팅에 나서 정치 선전장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더 크다. 그렇다 해도 릴레사의 예처럼 인권 파괴에 저항한 침묵의 제스처마저 대단한 용기는 물론이고 큰 희생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정진황 논설위원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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