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8월 24일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통일혁명당’조직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김형욱 중정부장은 북한 간첩으로 포섭된 김종태가 4차례 방북해 공작 자금으로 혁명조직인 지하당을 만들어 반정부ㆍ반미 활동을 획책했고, 기관지 ‘청맥’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김종태와 함께 월북해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던 김질락 이문규 등 셋은 사형을 당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들이 자백했듯이 중정의 저 발표가 모두 허위는 아니었다. 중정 발표 직전 저들을 구출하려던 북한 공작선이 한국군에 격침되기도 했다.
‘1ㆍ21 사태’ 7개월 뒤의 일이었다. 김신조를 비롯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무장 특수부대원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해 총격전을 벌인 사건. 통혁당 사건은, 박정희 군사정권으로선, 북한의 위협이 허구가 아니며 휴전선만 지킨다고 대한민국이 안전한 게 아니라는 점을 부각할 수 있는 다시 없는 재료였다. 두 사건, 특히 통혁당 사건의 후폭풍은 잔혹했다. 군사정권의 이념적 억압은 그 전에도 심했고 통혁당이 없었다고 덜했을 리 없지만, 통혁당이 있어서 정권은 더 당당해졌다.
중정은 김종태 등 3명을 포함해 관련자 158명을 검거, 73명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들 중 절대 다수는 김종태 등의 실체와 북한 연루 사실을 몰랐고, 심지어 ‘통혁당’이라는 조직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기세 등등해진 중정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의 포장지로 거대한 허구를 감싼 거였다. 64년의 인민혁명당 사건, 67년 동백림사건에 대한 중정의 조작 의혹 사실도 그렇게 덮였다. 74년 5월 중정은 민청학련 사건에 이어 그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발표했다. 인혁당 재건위 역시 실체 없는, 중정의 조작ㆍ과장의 결과였지만, 군사법원은 8명에게 사형을 선고, 그들을 사법 살인했다. 그 야만의 바탕에도 ‘통혁당’의 전과가 어룽거렸다.
올 초 작고한 신영복은 통혁당 사건의 연루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무기징역을 살다가 만 20년을 복역한 뒤 전향서를 쓰고 1988년 특별 가석방됐다. 출옥 직후 인터뷰 등을 통해 그는 자신이 중정 공작의 희생양이었다고, 온당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비록 전향서는 썼지만 ‘사상’을 바꾸지는 않았다고 말했고, 여러 권의 책을 썼지만 바꾸지 않은 사상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쓰지 않았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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